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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개통한 간성역 흔적 뚜렷하지만,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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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담 작가의 ‘옛 동해북부선 철길을 걷다’ <4> 간성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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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5월 27일(화) 08:19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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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간성역 터는 모래더미와 벽돌들이 군데군데 높게 쌓여 있지만 플랫폼, 승강장의 흔적은 길고 뚜렷하다. 천진리역-간성역 사이에 있는 역 터 가운데 그 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지만, 지금은 건축 재료를 파는 곳으로 또 밭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그 흔적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 ⓒ 강원고성신문 | | ‘넓직한 벌판에 단아하게 앉은 간성역’이라고 1936년 1월, 어느 일간지에 실린 답사기는 전했다. 고성역-간성역 구간은 1935년 11월 1일 개통, 영업이 시작되었다. 이 사이에 있는 역은 고성역에 이어 초구역, 저진역, 현내역, 거진역 그리고 간성역이었다. 이와 같은 순서는 동해북부선 공사가 북쪽인 함경남도 안변군에서부터 남쪽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옛 간성역사(杆城驛舍) 사진을 본 적 없으나 1932년 11월 1일 개통한 외금강역-고성역 구간의 고성역사 사진으로 유추해볼 수 있을 듯하다. 역사 정면이 삿갓 모양의 박공지붕인데, 이와 같은 모습은 현재 전라남도 곡성군에 있는 1933년 개통한 옛 곡성역사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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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남천1교를 앞두고 한우전문판매장 옆을 비껴 동산을 절개하여 만든 좁은 길을 지나 향목리에서 7번국도에 흡수 통합되어 흔적이 없었으니 무단횡단은 할 수 없고, 7번국도 아래 향목리 굴다리를 통과했다. | ⓒ 강원고성신문 | | 가진굴을 빠져나온 기찻길은 흔적조차 희미한 가진 철다리를 건너 대전차방어벽 앞에서 가진해변길에서 가향길로 바뀌었다. 저 멀리 첩첩한 금강산 향로봉과 건봉산 산줄기, 바닷가 솔숲을 바라보면서 북행하는 사이 길은 다시 남천1교를 앞두고 한우전문판매장 옆을 비껴 동산을 절개하여 만든 좁은 길을 지나 향목리에서 7번국도에 흡수 통합되어 흔적이 없었으니 무단횡단은 할 수 없고, 7번국도 아래 향목리 굴다리를 통과했다. 향로봉을 마주 바라보며 동해대로를 따라 걷다 길을 꺾어 ‘향목철교’라고 불렀음직한 다리받침 앞에서 멈추었다. 다리받침 남쪽으로는 고묵은 벚나무가로수길이, 북쪽으로는 한동안 철둑이 이어졌다. 다리받침과 다리받침 사이는 꽤 넓었고, 개천의 흔적은 없이 바투 논으로 이어졌으며 물길은 봇도랑만큼 좁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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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벚나무가 자리한 기찻길은 남천에서 끊어지고, 남천교를 건너자 길은 주차장이 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하다. | ⓒ 강원고성신문 | | 벚나무가 자리한 기찻길은 남천에서 끊어지고, 남천교를 건너자 길은 주차장이 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하다. 7번국도를 확·포장하면서 굴다리가 생긴 뒤 자취를 감추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천길 옆 물길에서 ‘금수(천)철교’라고 불렀음직한 다리받침을 간신히 만났다. 기이한 것은 다리받침 위에 무덤은 간 데 없고, 오석(烏石)으로 된 비석이 덩그마니 얹혀 있었던 것, 그 옆에는 또 다른 표지석이 하나 드러누워 있었고. 혼잣손으로는 들출 수도 없어 우두커니 서 있다 돌아섰다. 기찻길은 이제 너른 동호리 벌판을 바라보며 달렸을 것인데, 이 또한 주택과 농경지에 묻혀 자취는 어렴풋하여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천길 옆 물길에서 다리받침을 간신히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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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얼마 지나지 않아 남천길 옆 물길에서 ‘금수(천)철교’라고 불렀음직한 다리받침을 간신히 만났다. | ⓒ 강원고성신문 | | 간성(杆城)과 간성(干城), 1990년대 간성은 ‘88 스탠드바에서’로 시작해서 ‘전설처럼 北과 南의 파도들 동해바다에 뒹굴었습니다.’로 끝나는 곽재구의 시 「간성」으로 기억되었다. 잠시 기찻길에서 가로새서 간성읍성(杆城邑城) 탐방길을 걷기 위해 간성전통시장 주차장에서 나무 계단을 오른다. 간성읍성은 남천과 북천 사이, 평지성(平地城)이라고는 하나 너른 들판이 아닌 크고 작은 동산 위에 바윗돌과 흙으로 쌓아올린 1.3km에 이르는 읍성이다. 계단 옆 감나무들 사이, 돌무지로 남은 성벽을 보며 피와 땀, 눈물을 생각한다. 영산홍은 붉었고, 대나무 숲은 흔들렸으며 귀룽나무는 드레드레 꽃숭어리를 늘어뜨렸고 미끄럼방지 깔판을 뚫고 올라온 조선현호색은 꽃을 피웠으며 오래된 철책의 탐조등은 녹슬었다.
고려 덕종 2년(1033년)에 축조했다는 읍성은 일부는 헐리고 또 일부는 교회들이 들앉았고, 성의 동문과 서문은 ‘산을 깎고 논을 메우고 급히 만든 이등도로’. 7번국도가 생기면서 사라졌다. 읍성이 외적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축성된 것처럼, ‘당당한 고을이었던 간성은 이리 찢기고 저리 갈리어’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에는 ‘고성읍’이 없다. 군청 내 등성이의 가르맛길을 걷다 태양광 발전소를 지나 간성 배수지 앞 ‘6.25 전사자 유해발굴 기념지역’ 표지판에서 멈췄다. 한 번도 비껴가지 않은 전쟁, 동쪽 변방이었으나 또한 치열한 격전지였던, 한반도 마지막 전쟁의 상흔은 고스란하여 여전히 남고성, 북고성으로 갈라진 고성은 언제쯤 하나로 통일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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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군청 내 등성이의 가르맛길을 걷다 태양광 발전소를 지나 간성 배수지 앞 ‘6.25 전사자 유해발굴 기념지역’ 표지판에서 멈췄다. | ⓒ 강원고성신문 | |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배수지 옆으로는 충혼탑이 희게 빛나고 무엇보다 높이 솟아 우뚝한, 고묵은 상수리나무가 눈길을 끈다. 인간에게 제사를 받았던 나무 두 그루는 잎이 지는 겨울이면 겨우살이, 황금가지로 빛나지만 상흔은 뚜렷했고, 새봄 배쭈룩배쭈룩 새잎이 나서 여전히 푸르디푸르다. 나무를 옹립한 듯 했으나 둘레는 평지로 깎여서 마음은 숨가쁘다. 먼산주름 끝 흰 눈이 덮였던 향로봉은 이제 푸른 기운이 어리고,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다 순식간에 먹장구름으로 바뀌었다. 충혼탑을 지나 객사와 영월루가 있었다던 고성교육지원청 뜰로 접어들었다. 영월루(詠月樓), 달을 맞이하든, 달을 노래하든, 달을 그리워하든, 달의 이면을 궁금해 하든, 아무려나 달이었다. 동호리 뜰 너머 동해가, 읍성 너머 고성산, 산성이 바라다보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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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고성군청 내 은행나무 앞에 섰다. 고려말(1280년)에 심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나무는 전란 속 화염도 견뎌온, 만고풍상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이 없을 수 없겠으나 곳곳엔 수술 자국이 뚜렷했다. | ⓒ 강원고성신문 | | 고성군청 내 은행나무 앞에 섰다. 고려말(1280년)에 심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나무는 전란 속 화염도 견뎌온, 만고풍상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이 없을 수 없겠으나 곳곳엔 수술 자국이 뚜렷했다. 은행나무는 암수딴그루로 근처에 있던 암그루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사라지고 이제 열매 맺지 못하는 수그루만 남았다. 독락당이 아니었으니 절벽에 나무를 심었을 리 없건마는 나무는 지금 절벽 위 지지대가 가지를 떠받쳤다. 사철 언제 보아도 마음이 달뜨는, 인간만이 유일한 매개자인 은행나무는 수수만년 저 홀로 유일하고, 지금까지도 장엄한 기운을 품은 채 안녕하지만, 망월로 빛나는 어느 하룻밤 함께 하지 못하는 마음이 애석하기 그지없다.
난롯가에서 옹성옹성 기차를 기다리던 모습도
읍성은 곳곳에서 끊겼으므로 간성읍 행정복지센터 쪽으로 직진한다. 삿갓소나무 옆에 바투 새집이 들어서고 있어 곧바로 성을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미 교회와 교회가 성 위에 들어서면서 성벽을 허물었고 또한 도로를 냈으므로 성 안팎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그렇다고 해서 간성읍성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우리는 다만 왔다가 사라지는 그 과정에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고. 시간은 층층켜켜 쌓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지만, 한번 왔던 흔적은 영영 사라지지 않는 것일 테니 남아 있는 것이나마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온고지신(溫故知新)마저 옛말이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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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잠시 기찻길에서 가로새서 간성읍성(杆城邑城) 탐방길을 걷기 위해 간성전통시장 주차장에서 나무 계단을 오른다. | ⓒ 강원고성신문 | | 교회와 교회 사이 성벽을 헐고 길을 낸 아스팔트 도로를 넘다, 성(城)의 흔적은 이 소나무들이 증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겉어림하지만 그 또한 짐작일 뿐. 간성역 터, ‘정거장 모태이’로 향했다. 누군가는 ‘물탱크’로 또 누군가는 통천에서 기차 타고 시집온 어머니로 기억하는 간성역 터는 수문장처럼 느티나무 한 그루가 모래더미 속에서 환하다. 70년대 초 국민학교를 다녔던 이들에게 간성역 터는 급수탑이 높고, 그 둘레엔 오래된 벚나무들이 꽃을 피우는, 장날이면 동호리로 가는 이들이 다리쉼도 하던 곳으로. 내겐 1940년 8월의 어느 일간지에 소개된 맹견에 관한 기사로. 기사는 간성역 철도 관사 구내에 맹견을 사육했고, 그 목적이 구내 통행인을 막는 것인데 이 맹견이 한 달 새 간성소학교 학생 2명, 명덕학교생 1명을 물어서 부상을 입혔다는 것. 그러면서 한겨울 짚신 신은 사람들이 보따리를 옆에 끼고 난롯가에서 옹성옹성 기차를 기다리던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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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간성역 터는 모래더미와 벽돌들이 군데군데 높게 쌓여 있지만 플랫폼, 승강장의 흔적은 길고 뚜렷하다. | ⓒ 강원고성신문 | | 간성역 터는 모래더미와 벽돌들이 군데군데 높게 쌓여 있지만 플랫폼, 승강장의 흔적은 길고 뚜렷하다. 천진리역-간성역 사이에 있는 역 터 가운데 그 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지만, 지금은 건축 재료를 파는 곳으로 또 밭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그 흔적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간성역 터 ‘물탱크’로 부르던 급수탑도 1970년대 초까지 있었지만 경지정리를 하면서 사라졌다고.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시설로, 현재 전국에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철도역 급수탑이 12개 있고, 강원도에는 삼척 도계역 급수탑이 유일하다.
고성 동해안에는 소금을 굽던 염전이 흔했고, 이 또한 이름으로만 남은 간성읍 동호리 일대는 새롭게 부설되고 있는 동해북부선(강릉-제진) 노선 가운데 간성역이 들어설 예정인지라 논들 한가운데 노랗고, 빨간 깃발들이 줄느런히 꽂혔다. 옛것이 가고 새것이 오는 사이, 역 터에서 삥삥매던 발걸음을 돌려 북천철교로 향했다. 이남 동해북부선 가운데 다릿발, 교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그 북천철교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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