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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역 위치 내정되자 대포 유지들이 진정 넣어 간이정거장 설치

김담 작가의 ‘옛 동해북부선 철길을 걷다’ <10> 대포역

2025년 10월 14일(화) 10:35 [강원고성신문]

 

↑↑ ◇ 이곳에 대포역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으나 4차선 동해대로 농공단지 앞 사거리에는 자동차들만 쉼 없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할 뿐 어디에도 기차역 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 강원고성신문

속초에서 수십 년을 살았어도 그 존재조차 몰랐다던 동해북부선 대포역(양양군 도천면 대포리)은 간성-양양 구간의 일부로 1937년 12월 1일, 역원 배치 간이정거장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노선 개통 뒤 누구는 금강산을 구경하려고 누구는 명태를 팔려고 누구는 일터를 찾아 떠난 아버지를 만나려고 누구는 강제 징용으로 누구는 또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려고, 해방 된 뒤엔 ‘로스케’들이 들고나려고 ‘인공’ 때는 가족과 함께 강제 이주하라는 당의 명령을 따르려고 누구는 공부를 하려고 누구는 기관사가 되려고 누구는 또 입대를 하려고 탔을 기차, 기찻길은 전쟁의 와중에 끊겼고 장소가 사라지자 기억도 흩어졌다.

1937년 12월 1일 역원 배치 간이정거장으로 영업 개시

1937년 동해북부선 노선이 확정되기 전, 부산일보 1932년 11월 25일 자에 따르면 1932년 동해안철도측량대가 고성 방면에서 양양 방면으로 실측을 진행하는 가운데, 정류장 위치를 속초리에 내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포항에 사는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모여 대포의 앞날을 염려한 결과, 일본인 대포우편소장과 조선인 유지 정모 씨가 대포역 설치를 진정하기 위해 철도국으로 출발했다.

↑↑ ◇ 수복로로 바뀐 옛 철길을 걷는 가운데 중앙시장으로 익숙한 속초관광수산시장에 다다르기 전부터 도로와 인도는 자동차와 관광객들로 붐볐고.

ⓒ 강원고성신문

햇볕은 쨍쨍 내리쪼이고 소나기 한줄기 지나가지 않는 8월 어느 날, 속초역(양양군 도천면 속초리) 터에서 대포역 터로 향했다. 수복로로 바뀐 옛 철길을 걷는 가운데 중앙시장으로 익숙한 속초관광수산시장에 다다르기 전부터 도로와 인도는 자동차와 관광객들로 붐볐고, 서둘렀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길가에 원산한약국, 원산면옥 등의 상호가 눈에 띄었고, 이는 속초시(市)의 기원일 것이었으나 맹렬하게 솟아오른 고층아파트가 눈 앞을 가렸다. 인구 폭발은 도시 팽창의 밑거름이겠으나 어쩌다 숨구멍처럼 빈터가 나타났고, 설악산 대청봉과 울산바위를 바라보기에는 턱없이 비좁았다.

속초시의 ‘수복로’는 옛 동해북부선 철길이었다. 마치 철길 옆 판자촌과 오징어덕장이 아스팔트 도로로 바뀐 것처럼, 식민지 위에 전쟁이 한 켜 더 덧씌워진 셈이었다. 길섶, 지금은 속초 사잇길 제3길 수복길로 알려진 청학동 40계단을 올랐다. 마침 마당에 있던,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월남민 부모를 둔 50대 초반의 여주인을 만났다. ‘철둑길’이 있었고, 길 양쪽으로 ‘방석집’이 있었으나 수복로를 내면서 방석집 몇은 6구 시장으로 옮겨갔고. 재개발 이야기가 나왔으나 15~6평 집을 가진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자신의 집주소를 알려주면서 금호동 40계단이 아니고, 청학동 40계단이라고 정정했다. 설악신문 2020년 9월 28일 자, 전태극 선생의 사진에 따르면 지금 40계단은 2006년 수복로를 낼 때 다시 만든 것이었다.

↑↑ ◇ 속초시의 ‘수복로’는 옛 동해북부선 철길이었다. 마치 철길 옆 판자촌과 오징어덕장이 아스팔트 도로로 바뀐 것처럼, 식민지 위에 전쟁이 한 켜 더 덧씌워진 셈이었다. 길섶, 지금은 속초 사잇길 제3길 수복길로 알려진 청학동 40계단을 올랐다.

ⓒ 강원고성신문

전쟁 중에 생긴 속초초등학교 앞 교동장미거리를 지나자마자 쇠락하였으나 당당한, 어쩌면 그 운명을 다했을지도 모를 이용원이 나타났다. 그 맞은편 쪽에는 3대째 이어지고 있는 서점이 있고, 고개를 갸웃하면 고층아파트가 하늘을 가렸다. 이용원 텃밭에는 고구마 등이 자라고 있었으나 오래 머물지 못하고 교동사거리와 만천사거리를 거쳐 수복길이 끝나는 청초천을 가로지르는 청초2교로 불렸던 소야교(所野橋)에 다다랐다. 백두대간 미시령 부근에서 발원하여 청초호와 만나 바닷물과 섞이지만, 소야벌 경지정리를 하면서 직강공사를 하는 등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청초천은 여전히 맥을 이으며 수많은 다리들을 품고 있었다.

쌍성호라고도 불렸으나 이제는 엑스포광장으로 더 많이 알려진 청초호 또한 일제강점기에 시작하여 1963년 양양군 속초읍에서 속초시로 승격한 뒤 끊임없이 언저리 논들을 매립했다. 어느 때는 해상 방위의 수군만호영을 두고 병선을 정박시켜 두던 때도 있었으며 낙산사 대신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꼽기도 했고, 수영대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어업 황금기에는 덕장과 각종 수산물 작업장에서 나온 부산물들을 투기하고, 거기에 생활 오폐수까지 유입되면서 한때는 전국에서 오염도 가장 높은 호수이기도 했었다. 1999년 강원국제관광엑스포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호숫가에 청초호호수공원을 만들었다. 매립이 진행될 때마다 환경단체를 비롯하여 시민들이 나섰고, 그 힘이 또 2017년 청초호 유원지에 41층 고층호텔이 들어서는 것을 막았지만 개발의 힘은 몹시도 셌다.

↑↑ ◇ 교동사거리와 만천사거리를 거쳐 수복길이 끝나는 청초천을 가로지르는 청초2교로 불렸던 소야교(所野橋)에 다다랐다.

ⓒ 강원고성신문

청초호는 어느 시절 밤뱃놀이를 하던 풍취도 사라졌고, 매립을 거듭하며 면적이 졸아들기도 했지만 여전히 내항으로서 역할도 하고, 철새 도래지기이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속초는 놀랍도록 빠르게 팽창한 결과 어업 전진기지를 갖추고도 어쩐지 관광도시가 된 듯했다. 소야교 쯤에 이르러서야 이제는 쉽게 볼 수 없는 설악산을 가까스로 눈에 담을 수 있었고, 소야교를 건너자 길은 조양로(朝陽路)로 바뀌었다. 1990년대 초 택지 개발을 시작으로 조양동 일대에 생긴 대규모 아파트 단지 사이, 조양로 근처에는 선사시대 유적지를 비롯하여 1971년 개교한 조양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자그마치 세 개의 초등학교가 있었고, 오래된 문구점 주인은 꽃에 물을 주며 학교의 역사를 알려주었으나 어쩐지 아마득한 전설을 듣는 듯했다.

↑↑ ◇ 소야교 쯤에 이르러서야 이제는 쉽게 볼 수 없는 설악산을 가까스로 눈에 담을 수 있었고, 소야교를 건너자 길은 조양로(朝陽路)로 바뀌었다.

ⓒ 강원고성신문

단기 4289년(서기 1956년) 9월 25일, 삼능공업사가 발행한 지도를 보면 속초역을 지난 동해북부선 철길은 청초호를 빙 둘러서 마치 원을 그리듯 논들을 지나 논산리에 이어 부월리까지 이어졌다. 논들과 호숫가에 만든 철로였으니 길은 철둑이었을 텐데, 철길은 나이든 이들의 기억 속에만 있었다. 조양로가 끝나는 새마을 사거리에서 동해대로를 만나 대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동해대로 인도를 걷다 농공단지 앞 사거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 대포역이 있었다고 전해 들었으나 4차선 동해대로 농공단지 앞 사거리에는 자동차들만 쉼 없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할 뿐 어디에도 기차역 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장소를 안내해 준 엄경선 선생에 따르면 이곳은 간이역이었지만 예비 선로도 갖춘 곳이었다.

철로의 흔적은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아

↑↑ ◇ 1919년 3월부터 전국 각처에서 들불처럼 세차게 일었던 독립만세운동이 이곳 대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를 기념하는 「대포 만세운동 기념관」이 일제강점기 옛 순사주재소 자리에 있었다.

ⓒ 강원고성신문

옛 대포역 관사 터로 향하는 대신, 대포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매가 가팔라서 생선 ‘리야카’를 끌고 꼬댕이를 올라올 때는 혼자서는 끌 수 없어 아이들에게 1원을 쥐어주고 뒤를 밀게 했다던 대포고개를 내려갔다. 대포항(大浦港), ‘한개’라는 이름은 잊혔지만 1909년 연안항로 기항지로 개항되면서 속초의 시작을 알렸으며 무엇보다 1919년 3월부터 전국 각처에서 들불처럼 세차게 일었던 독립만세운동이 이곳 대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를 기념하는 「대포 만세운동 기념관」이 일제강점기 옛 순사주재소 자리에 있었다. 이국범과 그의 동생 이석범과 이석범의 아들 이능렬 들이 교회들과 연합하여 수천 명의 면민들과 함께 비폭력 만세 시위를 벌였고, 일제는 이에 맞서 무차별 진압으로 대응하였으며 비폭력 평화시위는 무력시위로 바뀌었고 따라서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체포와 구금이 이어졌다.

↑↑ ◇ 대포항 전망대에 올랐다. 방파제를 쌓고 바다와 모래불을 매립하여 주차장과 상가를 만든 대포항은 난전도 수산시장 건물 속으로 들어왔으며 동해를 막아선 고층 호텔들이 우뚝했다.

ⓒ 강원고성신문

대포항 전망대에 올랐다. 방파제를 쌓고 바다와 모래불을 매립하여 주차장과 상가를 만든 대포항은 난전도 수산시장 건물 속으로 들어왔으며 동해를 막아선 고층 호텔들이 우뚝했다. 먼 바다가 눈길을 사로잡았으나 상여막이기도 했었고, 해신제도 지낸다는 할머니서낭당으로 향했다. 바닷가엔 늘 할머니서낭이 있었다. 바다도 어머니여서 그럴까. 잠시 서성거리는 사이 개를 앞세운 일행이 나타났다. 대포초등학교를 졸업한 남성은 매립하기 전 대포 바닷가에서 째복이 아닌 비단조개를 잡았고, 대포초등학교 옆 철길로 물치를 오갔노라고 했지만 또 누구는 바닷물 속에서 발바닥을 밀고 다니면서 째복을 잡았노라고 했다.

↑↑ ◇ 대포항 상가 내에서 밥집을 찾았고, 울릉도에서도 못 먹었던 오징어내장탕을 만났다.

ⓒ 강원고성신문

대포항 상가 내에서 밥집을 찾았고, 울릉도에서도 못 먹었던 오징어내장탕을 만났다. 어릴 적 소금항아리 속에 보관했다 제사 때만 먹을 수 있었던, 또 어느 때는 흔하디흔했다가 또 어느 때는 구경조차 못할 만치 귀해진 오징어내장탕을 먹으면서 속초역 터에서 대포역 터에 이르기까지 철로의 흔적은 하다못해 청초천을 지나고 있으니 철교의 다리받침이라도 있어야 했으나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은 까닭을 곱씹었다. 산을 잃고 아파트만 얻은 것일까.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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