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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2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 개시, 한국전쟁 와중에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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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담 작가의 ‘옛 동해북부선 철길을 걷다’ <11> 낙산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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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12일(수) 10:59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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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옛 낙산사역 터였던 그곳 옛 주소는 ‘양양군 강현면 정암리 448-2번지’였다. | ⓒ 강원고성신문 | | “양양 낙산사와 전진해수욕장은 이미 널리 알려진 명승지로서 일 년을 통하여 수천의 유람객이 왕래하는 곳으로 처음 정거장이 없어서 일반은 극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터에 강현면에서는 철도 당국에 수차례 진정을 하였든 바 결국 임시역을 두기로 결정이 왔다”고 1937년 9월 18일 자 동아일보는 전했지만, 1937년 12월 1일 간성-양양 구간을 개통할 당시 낙산사역(양양군 강현면 정암리)은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고, 한국전쟁 와중에 폭격됐다. 이름은 낙산사역이지만, 낙산사까지 가려면 한 시간쯤 걷든 아니면 뱃길을 이용해야 했다. 낙산은 산스크리트어인 포탈라카(Potalaka)를 음역한 보타락산(補陀落山)에서 온 말로써 관음(觀音)의 정토이며 화엄경에 의하면 선재동자가 관음을 뵈었던 곳이다. 오봉산 낙산사 홍련암 아래에 관음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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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대포역 터에서 설악산로4번길로 접어들었다. 곧이어 대포역 관사 터였다고 하는 대포교회가 나타났다. | ⓒ 강원고성신문 | | 대포역 터에서 설악산로4번길로 접어들었다. 곧이어 대포역 관사 터였다고 하는 대포교회가 나타났다. 왼쪽에는 공사 중인 1919년에 개교한 대포초등학교가 보였고, 일제강점기 도천면사무소였던 자리는 대포윗마을 경로당으로 바뀌었으며 그 앞 텃밭에서 울타리를 치던 어르신들은 역사(驛舍) 터와 관사 터는 헷갈렸으나 철길만은 한목소리로 한 곳을 가리켰다. 교회를 지나 방축길과 갈라지는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어르신들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차렸다. 설악산로4번길과 대포해맞이2길을 만나는 데까지 옛 동해북부선 철길이었고, 산 기스락을 휘돌아가는 철둑길은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로 비좁았기 때문이었다. 갈림길에 서면 철둑길 아래 골짜기에 들어선 마을과 대포항 그리고 바다를 가로막고 서 있는 고층 호텔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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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설악산로4번길과 대포해맞이2길을 만나는 데까지 옛 동해북부선 철길이었고, 산 기스락을 휘돌아가는 철둑길은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로 비좁았기 때문이었다. | ⓒ 강원고성신문 | | 해방 뒤 소군정 시절, 대포역으로 혹은 낙산사역으로 오가는 기차에 ‘한국 여자들을 강탈하는 로스케’들이 타고 있으면 소년들은 기차를 향해 돌멩이를 던져 항의했고, 그러면 역에서 학교에 소년들을 처벌해달라고 연락했고, 이에 부모들은 또 학교에 살려달라고 빌었다. 아니면 퇴학당할 수도 있었다고, 대포에서 태어나 대포초등학교를 졸업한(수료한) 김동식 옹은 2019년 1월, 속초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엄경선 연구위원과의 면담에서 말했다. 소년들은 또 ‘차가 온다’고 하면 레일 위에 쇠못을 깔아 놓았고, 기차가 지나가면 납작하게 된 못을 갈아서 연필 깎는 칼을 만들었다고. 한반도에 처음 기차가 등장했을 때도 땅과 집을 빼앗기고, 조상들 묘지를 잃은 이들이 레일 위에 바윗돌, 가마니 등을 올려놓는 것으로 침탈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한여름엔 열기가 식은 레일 위에서 잠을 자다가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
레일 위에서 잠을 자다가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
대포항과 바다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으며 길섶에는 주택들이 뜸을 이룬 곳도 있었고, 어쩌다 텃밭으로 일군 곳을 지나면 그저 풀밭이었고, 그곳을 넘나드는 호랑나비 떼를 눈으로 쫓으며 걷다보면 고층 호텔들이 자리했으나 대포해맞이길과 만나기 전 내물치쉼터까지는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다. 설악산로4번길은 ‘내물치쉼터’를 비껴 쌍천 철교 다리받침까지 이어지지만, 내물치쉼터에 다다르면 철길에 쉼터가 자리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고,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주차장도 그러했고 공원으로 이어지다 ‘세계명산 설악산’이라고 쓴 전망대가 딸린 아치 또한 그러했으므로 잠시 바다와 낙산사 방향을 바라다보며 서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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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내물치마을’이라고 쓴 표지석 앞 횡단보도 줄금은 마치 철길을 잇는 듯했고, 잠시 옆으로 비껴서면 안경굴이라고 불릴 만하고 흔히 암거라고 불리는 한 쌍의 굴이 나타난다. | ⓒ 강원고성신문 | | ‘내물치마을’이라고 쓴 표지석 앞 횡단보도 줄금은 마치 철길을 잇는 듯했고, 잠시 옆으로 비껴서면 안경굴이라고 불릴 만하고 흔히 암거라고 불리는 한 쌍의 굴이 나타난다. 이 하도문천 암거 위에는 인공폭포가 조성되었으니 철길은 잊힌 채 물길이 물길을 이고 있는 셈이었다. 공원 내 산책로를 따라가면 쌍천 다리받침 즉, 교대에 이른다. 진행 방향에서 보면 수풀 속에 통신망 전봇대만 우뚝하다. 나무 계단을 통해 수풀 우거진 쌍천으로 들어섰다. 어느 때엔 붓꽃과 참나리들이 작벼리에 듬성드뭇하였고, 또 어느 때는 사위질빵과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철교 다리받침이 드러났다. 물길이 두 줄기로 나눠져서 붙인 이름이라는 쌍천엔 철교의 다리받침이 속초 쪽에만 남았고, 양양 쪽에 언뜻 보면 비슷한 다림받침이 있었으나 이것은 옛 쌍천교의 다리받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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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물길이 두 줄기로 나눠져서 붙인 이름이라는 쌍천엔 철교의 다리받침이 속초 쪽에만 남았고, 양양 쪽에 언뜻 보면 비슷한 다림받침이 있었으나 이것은 옛 쌍천교의 다리받침이다. | ⓒ 강원고성신문 | | 쌍천교를 경계로 속초시와 양양군으로 나뉘고 로타리공원을 지나면 철길은 물치3길로 바뀐다. 길섶에는 노랑코스모스가 물결치고 꿀을 탐하는 호랑나비들은 매바빴다. 물치3길은 다시 물치천로와 만나고, 이윽고 물치천(沕淄川))과 마주친다. 쌍천철교와 더불어 물치철교 다릿발도 2006년에 철거되었으니 물치교를 건넌다. 철광석 광산으로 인해 검은 물이 흘러 이름 지었다는 물치천에는 가마우지가 자리를 잡았고, 그 사이를 왜가리와 백로, 제비갈매기들이 오르내렸다. 사라진 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으므로 설악산 대청봉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물치천을 따라 둔전계곡, 진전사터로 향했다. 자동차로만 오갔던 길을 길동무와 걷기 시작한 어느 날 길이 어긋나면서 하복리, 회룡리, 석교리, 간곡리, 둔전리를 모두 거쳐 진전사터 삼층석탑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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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자동차로만 오갔던 길을 길동무와 걷기 시작한 어느 날 길이 어긋나면서 하복리, 회룡리, 석교리, 간곡리, 둔전리를 모두 거쳐 진전사터 삼층석탑에 이르렀다. | ⓒ 강원고성신문 | | 날은 뜨겁고,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궁시렁대던 회룡리에서는 보호수인 음나무를 만났다. 고묵은 나무는 한눈에도 풍상을 겪은 모습이 고스란했지만 벚나무와 함께 꿋꿋했고, 다시 길을 잃을 뻔했던 갈림길에서는 집배원을 만나서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점심때를 지나쳤으므로 둔전리 길섶 매점에 들러 생맥주와 골뱅이무침으로 점심했다. 주인장은 배고파 보인다며 골뱅이무침에 국수를 넉넉히 주었다. 평소 즐기지 않는 맥주였지만, 다디달았다. 집배원을 매점에서 다시 만났고, 음료수로 답례했다. 다시 기운을 차려 화채봉길을 걸었고, 길은 하수관로 공사 중으로 덤프트럭들이 오갔으며 걷는 이는 없었다. 멀리 송전탑이 보였으므로 다 왔노라는 내 말에 진전사터 방문이 처음이 아니었던 길동무는 긴가민가했다.
쌍천철교와 더불어 물치철교 다릿발도 2006년에 철거
오래전 고운기가 지은 『일연』을 읽고서 처음 진전사터를 찾았다. 앞뒤 첩첩한 산줄기 사이 허허벌판에 삼층석탑만 오롯했던, 그렇더라도 한쪽으로는 또 낙산 방향으로 바다가 열려 있는 그곳을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이 구족계를 받은 곳이라는 이유로 한달음에 달려갔었다. 그 뒤『삼국유사』를 집필했다는 군위 인각사까지 돌아보았다. 임진왜란 이전에 폐사했다는 진전사터에는 창건주인 도의선사 부도탑도 있었고, 그 탑은 삼층석탑과는 조금 떨어져 있어서 삼층석탑 주위를 맴돌다 돌아오곤 했다. 벚나무 그늘에 누워 바람소리를 듣고 싶었으나 하수관로 공사 중인 포클레인 소리에 고요는 저만치 물러갔고, 한 모금 낮술에 졸음이 몰려왔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바닷가에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과 관음보살을 만났으나 알아채지 못한, 숲속에 영혈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진 원효, 그들의 거리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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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다시 물치천 둑길을 걸어서 물류창고로 쓰고 있는 옛 강현농협 창고 마당을 지나 하나철강과 잇대어 있는 다리받침을 바라보며 섰다. | ⓒ 강원고성신문 | | 다시 물치천 둑길을 걸어서 물류창고로 쓰고 있는 옛 강현농협 창고 마당을 지나 하나철강과 잇대어 있는 다리받침을 바라보며 섰다. 물치천으로 흘러가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다리받침 하나는 없어지고, 하나만 남은 다리받침 주변에는 때때로 물총새며 오리, 백로들이 인기척에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매번 흙탕물이어서 이유가 궁금했다. 다리받침이 사라진 철둑은 밭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그물망을 쳐놓아 맘대로 들어설 수 없었다. 철길은 공장과 주택, 밭으로 바뀌었고, 작은 다리를 건너고 삼거리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 옛 속초공항 쪽이 아닌 농수로를 곁에 둔 진미로로 접어들었다. 양양 출신의 시인 김종헌이 쓴 ‘땀을 흘리고 풀을 뽑던 감자밭은 낙산사역의 직원들이 살던 관사 자리였’고, 자신이 ‘칼싸움을 하던 시멘트 바닥이 바로’ ‘낙산사역의 플랫폼 자리였’다는 말을 떠올리며 농수로 공사 중인 ‘진평벌’을 바라보며 놀민놀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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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고샅을 사이에 두고 코레일연수원 후문과 마주한 마구간을 비롯한 벼 건조장 옆에는 플랫폼 흔적이 남아 있었고, 플랫폼 위에는 잡풀과 함께 콩이 자라고, 경운기 등의 농기구와 컨테이너들이 자리했으며 때때로 개가 짖었지만 망초 밭으로 바뀐 철둑길을 걸어 강현파출소 언저리까지 갔다 도서곤 했다. | ⓒ 강원고성신문 | | 소를 키우지만 어릴 적 ‘마구간’이라고 불렀던 축사로 접어들었다. 고샅을 사이에 두고 코레일연수원 후문과 마주한 마구간을 비롯한 벼 건조장 옆에는 플랫폼 흔적이 남아 있었고, 플랫폼 위에는 잡풀과 함께 콩이 자라고, 경운기 등의 농기구와 컨테이너들이 자리했으며 때때로 개가 짖었지만 망초 밭으로 바뀐 철둑길을 걸어 강현파출소 언저리까지 갔다 도서곤 했다. 옛 낙산사역 터였던 그곳 옛 주소는 ‘양양군 강현면 정암리 448-2번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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