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6-04-29 오전 09:25:44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고성문학회 회원작품 릴레이특집여성-여당당노인-노년시대청소년-1318종교-더소울이선국의 <길에서 금강산을 만나다>
최종편집:2026-04-29 오전 09:25:44
검색

전체기사

고성문학회 회원작품 릴레이

특집

여성-여당당

노인-노년시대

청소년-1318

종교-더소울

이선국의 <길에서 금강산을 만나다>

커뮤니티

공지사항

뉴스 > 기획/특집 > 특집

+크기 | -작게 | 이메일 | 프린트

동해선 하나로 연결되지 못한 채 해방… 양양역은 마감역이자 처음역

김담 작가의 ‘옛 동해북부선 철길을 걷다’ <12> 양양역

2025년 11월 27일(목) 09:28 [강원고성신문]

 

↑↑ ◇ 옛 양양역 터엔 역사, 플랫폼, 관리사무소, 조구통, 얼음 창고 등의 콘크리트 구조물 흔적이 남아 있었다.

ⓒ 강원고성신문

일제강점기인 1925년 조선총독부는 철도망 확충을 위해 ‘조선철도 12년 계획’을 세웠고, 이 5개(도문선, 혜산선, 만포선, 동해선, 경전선) 간선 철도 가운데 하나인 ‘동해선은 동해안 일대의 어항과 강원도 일대의 탄광을 개발하여 석탄, 목재, 광물, 해산물을 수송하고, 부산과 원산 및 함경선을 연결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에 1927년 일본 제국의회의 승인을 받아 공사에 착수하였고, 동해북부선은 안변역 분기안이 제기되어 당초 갈마역 분기안과 비교한 결과 1927년 5월 안변역 분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1928년 2월, 1914년 개통한 경원선 안변역을 기점으로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행하는 동해북부선(안변-포항) 철도 공사가 시작되었다.

한겨울 늦은 밤 다음 기차로 갈아타기 전 냉면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었던 안변역, 누군가는 안변평야에서 생산되는 쌀로, 누군가는 사과 과수원으로, 누군가는 석왕사와 가학루로, 또 누군가는 독특한 창난젓으로 기억할 안변역에서 이제 나는 안변산 사과를 베먹으면서 ‘1938년 임시 열차를 타고 만주로 집단 이주를 떠나는 고성군 화전민 80호 390여명’을 떠올리면서 식민지 조선 원산에서 함경선으로 바꿔 타고 주을온천에 들렀다가 두만강을 건너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탈 수도 있었고, 안변역에서 경원선으로 바꿔 타고 경성, 서울로 향할 수도 있었다.

1937년 12월 1일 동해북부선 간성-양양 사이 41.9km가 개통되었고, 이날 ‘오전 11시 30분 양양역(강원도 양양군 양양면 송암리) 구내에서 김 강원도지사(金 江原道道知事) 삼포 토목과장(三浦 土木課長) 본부 철도국 강기 건설과장(江崎 建設課長) 등이 참석하고 관민 5백 명이 참석하여 개통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로써 함경남도 안변역과 강원도 양양역 사이 192.6km가 연결되었으며 1939년 12월 양양-강릉 구간을 개통할 예정이었으나 간성-양양 사이를 마지막으로 동해북부선 개통은 더 이상 없었고, 경상도와 강원도 함경도를 잇는 동해선과 함경선(원산-상산봉)을 연결하여 제2 종관철도를 부설하려던 계획도 무산되었다.

부산진까지 완성할 계획… 연결되지 못한 채 해방 맞아

처음 ‘동해선’을 계획할 당시는 함경남도 안변에서 경상남도 부산진까지 동해북부선, 동해중부선, 동해남부선으로 나뉘어서 작업, 1938년 완성할 계획이었으나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재정의 신축(伸縮)에 맞추어 일부는 연기되’면서 동해선은 하나로 연결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 그리하여 양양역은 마감역이자 처음역이 되었다. ‘동해북부선 양양 이남은 삼척군까지 노반공사가 진행되었다.’ 양양군 남대천에 지금은 없는 ‘젓가락’ 같은 다릿발이 서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고, 양양읍 이남 곳곳에 아직까지 역 터와 다리받침들이 남아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 ◇ 낙산사역 터에서 양양역 터로 향했다. 철길은 코레일낙산연수원, 군부대 안으로 사라졌다가 농협주유소 뒤편 정암1길로 모습을 드러냈다.

ⓒ 강원고성신문

낙산사역 터에서 양양역 터로 향했다. 철길은 코레일낙산연수원, 군부대 안으로 사라졌다가 농협주유소 뒤편 정암1길로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에는 동해와 숙박시설 사이로 동해대로가 달리고 있었고, 오른쪽 길가 좁은 텃밭에는 호랑나비들이 날고 있었다. 바다는 멀어졌고, 본래 숲이었던 철길은 숲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궤도 폭만큼만 남았다. 개통 당시 낙산사역-양양역 거리는 7.4km였고, 낙산사와는 거리를 두었다. 옛사람이 ‘시가 중심이 아니고 부설의 편의만 치중한 것’이라고 했던 말은 헛말이 아니었다.

↑↑ ◇ 강현면 용호리에서 첫 굴다리를 만났다.

ⓒ 강원고성신문

강현면 용호리에서 첫 굴다리를 만났다. 어느 지역에나 하나쯤 있는 용호리라는 지명은 늪이나 못과 관련이 있고 앞에 용(龍)이 붙었으니 이 또한 용의 전설을 품고 있을 법도 한데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한자어로 바뀌었다. 굴다리는 높고 좁았으나 서쪽으로는 설악산 대청봉과 이어졌으며 그 너른 품에 크고 작은 도랑과 내들이 동해로 흐르다 문득 멈춘 곳에 논을 떴고, 좁은 농로가 실핏줄처럼 이어졌다. 손을 덜 탄 아름드리 소나무 떼판을 바라보며 ‘천혜의 임산물이 풍부하여 숯, 장작, 목재는 벌채 허가가 까다롭지 않은 것을 기회로 막 쏟아지는 통에 서울에서도 양양 장작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쳐준다’ 는 1939년 신문기사를 떠올리며 지금 남부지역에서 창궐하고 있는 소나무재선충을 생각했다.

↑↑ ◇ 철길은 정암1길에서 용호길로 바뀌었고, 주택들 사이를 지나 용호리의 두 번째 굴다리를 만났다.

ⓒ 강원고성신문

철길은 정암1길에서 용호길로 바뀌었고, 주택들 사이를 지나 용호리의 두 번째 굴다리를 만났다. 개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시멘트로 포장한 농로가 길게 이어졌다. 건듯 보면 굴다리인 줄 알아채기 어려웠고, 두 번째 걸을 때에야 비로소 알았다. 개천에는 마을 영농조합 이름으로 어로행위를 하지 말라는 낡은 경고판이 서 있었는데 어종 가운데 쌀미꾸리를 달리 부르는 ‘옹고지’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굴다리를 지나면 길은 숲속 비포장으로 이어졌고, 길옆은 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고성 관내 우체국에서 근무하다 은퇴했다는 텃밭 주인은 숲속으로 난 길이 철길임을 확인해 주고 임대료 없이 농사를 짓고 있다며 길이 포장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지만, 걷는 사람에겐 비포장 길이 반가웠다.

↑↑ ◇ 굴다리를 지나면 길은 숲속 비포장으로 이어졌고, 길옆은 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고성 관내 우체국에서 근무하다 은퇴했다는 텃밭 주인은 숲속으로 난 길이 철길임을 확인해 주고 임대료 없이 농사를 짓고 있다며 길이 포장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지만, 걷는 사람에겐 비포장 길이 반가웠다.

ⓒ 강원고성신문

야트막한 숲 고개를 넘자 레미콘 공장이 있었고, 철길 왼쪽에는 수풀에 가려진 옹벽이 드러났다. 늙은 부부는 길 한가운데서 아람이 분 밤을 주웠고, 인사를 건넸더니 쑥스러워했다. 대나무 숲으로 이어진 비포장 길이 끝나고 용호길은 안골로로 바뀌었으며 안골로와 안골로가 만나는 사거리부터는 이차선 포장도로였다. 바다 쪽으로 말뚝 같은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고, 낙산을 떠올렸다. 다리에는 답리교라는 이름표도 있었으나 철길의 흔적은 없었으며 길은 주청1길로 바뀌었다. 답리(沓里)와 주청리(酒廳里), 조산리(造山里), 포월리(浦月里), 청곡리(靑谷里), 송암리(松岩里)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를 생각하며 방아잎, 깨나물이라고도 불리는 배초향 떼판이 호랑나비 떼를 불러 모으고 있는 길가 텃밭머리에 섰다.

↑↑ ◇ 포월천 마을회관진입교 옆에는 철교 다리받침이 양쪽에 남아 있었고, 다리받침을 허물지 않고 길을 돌아서 다리를 놓은 것도 이색적이었는데, 다리 이름은 마을회관진입교였다. 길은 포월새말길로 바뀌었다.

ⓒ 강원고성신문

포월천 마을회관진입교 옆에는 철교 다리받침이 양쪽에 남아 있었고, 다리받침을 허물지 않고 길을 돌아서 다리를 놓은 것도 이색적이었는데, 다리 이름은 마을회관진입교였다. 길은 포월새말길로 바뀌었다. 길가에 돼지농장이 있었고, 굴다리가 있는데 수풀이 우거져 내려설 수 없었다. 묵정밭에 철도공단에서 무단 점유에 대한 안내문을 써놓은 푯말을 지나니 銷夏亭이라는 현판을 단 정자가 있었다. 서너 번 그곳을 오가는 동안 정자 주변에 운동기구를 이용하는 이도, 정자 그늘에서 쉬는 이도 만날 수 없었다. 포월농공단지 앞을 지나 양양읍 포월리 자동차정비소 앞 정손길을 만나면서 갑작스레 철길은 끊겼다. 그러나 남쪽 길옆 낮은 축대 뒤로 수풀 우거진 철둑이 청곡천까지 이어졌다.

옛 양양역 주변에 남았던 자취 또한 곧 사라질 것

↑↑ ◇ 길을 돌아 동해대로 청곡교를 끼고 감동골로로 들어섰다. 감곡리를 알리는 입석이 서 있고, 가드레일 너머 청곡천이 흐르며 저쪽 수풀 속 철둑 끝에 다리받침이 있고, 이쪽 다리받침은 가드레일 밑에 묻혔다.

ⓒ 강원고성신문

길을 돌아 동해대로 청곡교를 끼고 감동골로로 들어섰다. 감곡리를 알리는 입석이 서 있고, 가드레일 너머 청곡천이 흐르며 저쪽 수풀 속 철둑 끝에 다리받침이 있고, 이쪽 다리받침은 가드레일 밑에 묻혔다. 청곡교차로 고가도로 밑을 빠져나와 가드레일을 넘어 밭들 사이 농로로 들어섰다. 청곡길과 동해대로가 만나는 동해대로 도롯가 음식점 앞을 지나 청곡2리 마을회관 앞 수양버들나무 앞에 섰다. 새 고층 아파트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철길은 새로운 찻길과 공원이 생기면서 사라졌고, 송암길로 들어서서야 겨우 이을 수 있었다. 송암길 좌우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고, 가까이 뱀째산(범재)은 강릉-제진선 철도 공사 중이었다.

↑↑ ◇ 쓰레기로 에넘느레한 나무숲엔 양양역 플랫폼 자국이 남았지만, 나무줄기에는 파란 끈이 묶였다.

ⓒ 강원고성신문

쓰레기로 에넘느레한 나무숲엔 양양역 플랫폼 자국이 남았지만, 나무줄기에는 파란 끈이 묶였다. 옛 철길인 송암길에서도 공사 중인 강릉-제진선 고가 다릿발이 눈에 들어왔다. 옛 양양역 터엔 역사, 플랫폼, 관리사무소, 조구통, 얼음 창고 등의 콘크리트 구조물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치하 당시에도 마감역이자 처음역이었던 양양역은 서면 철광석 광산으로 이어지던 철길은 물론 ‘역 광장 주변에 여관과 경찰주재소 등의 건물을 비롯 청곡리엔 10여 동의 관사와 여러 동의 창고, 기관차를 넣어 두거나 수리하는 기관고가 있었’으나 전쟁의 와중에 폭격되었다. 역 터 주변에 이어 양양 남대천에도 강릉-제진선 다릿발 공사 중이었으니 옛 양양역 주변에 남았던 자취 또한 곧 사라질 것이었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행복한 고성 만들기”
- Copyrights ⓒ강원고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강원고성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강원고성신문

 

이전 페이지로

실시간 많이본 뉴스

 

버스 무료 이용 속초까지 가능..

외국인 계절근로자 활성화 상생협..

인구 감소·경제 침체 등 구조적..

고성군 인구 3년 만에 27,0..

하천·계곡 불법행위 대대적 정비..

2026년 ‘고성 DMZ 평화의..

고성군수 선거 함명준·박효동 맞..

토성농협 조합원 자녀 장학금 전..

금강농협 다문화가정 위한 장학금..

2026년도 정부 보급종 콩 개..

최신뉴스

체류형 관광 기반 구축·기업..  

죽왕면과 고성군의 실질적 변..  

지역구 고성군의원선거 총 1..  

함명준 군수 예비후보 선거사..  

김진 군의원 예비후보 선거사..  

강원선관위 장애인단체 업무협..  

농가에 외국인 계절근로자 1..  

금강농협 조합원 자녀 장학금..  

농관원 6월 30일까지 하계..  

치매, 함께 보듬어야 할 이..  

자원봉사센터 취약계층 장애인..  

고성소방서 현장대응능력 강화..  

토성면 의약분업 예외지역 취..  

기하의 언어로 풀어낸 감정의..  

‘2026 콩닥콩닥 탐사단’..  



인사말 - 연혁 - 찾아오시는 길 - 광고문의 - 제휴문의 - PDF 지면보기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구독신청

제호: 강원고성신문 / 사업자등록번호: 227-81-17288 / 주소: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간성로 29 2층 / 발행인.편집인: 주식회사 고성신문 최광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광호
mail: goseongnews@daum.net / Tel: 033-681-1666 / Fax : 033-681-1668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강원 아00187 / 등록일 : 2015년 2월 3일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최광호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