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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사회에서 친절하기

금강칼럼 / 박선애 칼럼위원(시인)

2026년 04월 22일(수) 08:17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화사하던 벚꽃이 지고, 연둣빛 잎이 그 자리를 채운다. 봄은 늘 세상이 아직 괜찮다는 느낌을 준다. 따뜻한 공기와 밝은 풍경은 별 이유 없이도 삶에 기대를 품게 한다. 그러나 지난 주말, 나는 그 계절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가 사는 사회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경기도의 한 도시로 가기 위해 마지막 버스를 예매해 두고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였다. 친구의 차에서 내려 곧장 버스에 오르려던 찰나,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바일 티켓이라서 버스를 타지 못하고 주머니와 가방을 몇 번이나 뒤졌지만 나오지 않았다. 출발까지는 10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급한 마음에 근처에 있던 학생에게 다가가 전화를 한 통만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몇 번을 더 말을 건넸지만, 결국 그는 의도적으로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황스러움은 곧 서운함으로 바뀌었다.

다른 젊은 여성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는 난처한 표정으로 “어떡하죠…”라는 말만 반복했다. 분명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있어 보였지만, 어떤 행동도 선택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결국 터미널 매점으로 뛰어 들어가 전화를 쓸 수 있겠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짧고 건조했다.

“공중전화 쓰세요.”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터미널 한쪽에 놓여 있던 공중전화.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사용해 본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동전을 넣고 번호를 누르는 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친구가 전화를 받는 순간, 출발하는 버스가 눈앞을 지나갔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수화기를 들고 서서 그대로 울고 말았다.
그 눈물은 단순히 버스를 놓친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도움을 받지 못한 서운함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누구도 쉽게 손을 내밀 수 없는 이 상황과 그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 자신이 서글펐다.

전화 한 통도 빌려줄 수 없는 사회

우리는 언제부터 전화 한 통도 선뜻 빌려줄 수 없는 사회가 되었을까. 곱씹어보면 이유는 분명하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기 어려워졌고, 익명성은 관계의 기본값을 ‘신뢰’가 아닌 ‘경계’로 바꾸어 놓았다. 사이버 범죄와 각종 사기 사건들은 타인의 부탁을 의심하는 태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 낯선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매정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일종의 상식이 되었다. 문제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덜 착해졌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타인을 돕고 싶어 한다고 믿는다. 다만 그 마음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겨야 할지 모를 뿐이다.

그날 만났던 젊은 여성의 모습이 떠오른다. 분명 공감하고 있었지만,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던 모습.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돕고 싶지만 망설이고, 이해하지만 행동하지 못하는 상태.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핸드폰을 직접 건네지 않더라도 대신 전화를 걸어줄 수 있고, 스피커폰을 이용해 함께 통화할 수도 있다. 혹은 공중전화나 안내소 같은 공공시설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도움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신뢰’가 아니라, 경계를 유지하면서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식을 아는 것이다.

친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복잡해진 환경 속에서 표현 방식을 잃어버린 것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도덕적 요구가 아니라, 현실에 맞는 새로운 친절의 방식이다.

그날 나를 외면했던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이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다만 그 경험을 통해 한 가지는 분명히 느꼈다.

불신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조건일지라도, 친절까지 포기해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도, 완전히 외면할 필요는 없다. 경계는 유지하되, 도움의 방식을 고민하는 것. 그 작은 선택과 연습이 쌓일 때, 우리는 다시 조금 더 따뜻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봄이 매년 돌아오듯, 사람 사이의 온기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지켜내는 일은 더 이상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는다. 이제는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배워야 할 태도가 되었다.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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