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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태어’로 표기되다 ‘명태’와 ‘북어’라는 이름이 함께 나타난다

고성명태傳 ② 명태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

2026년 05월 01일(금) 12:28 [강원고성신문]

 

↑↑ <사진 1> <송남잡지>14, 어조류, 북어명태(규장각원문서비스)

ⓒ 강원고성신문

고대 인류가 식량을 획득하는 방법은 수렵, 채집, 고기잡이 세 가지였다. 수렵과 채집은 농경과 목축이 발달하면서 점차 사라졌으나, 고기잡이는 이후에도 여전히 과거의 위상을 지켜오면서 장기지속의 식량 활동이 되었다. 인간이 물고기를 잡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200만 년 전이라고 한다. 고고학자이면서 『피싱』의 저자인 브라이언 페이건은 “어부와 어부가 잡은 물고기가 없었다면 파라오는 이집트 기자(Giza)의 피라미드를 세우지 못했고, 캄보디아의 그 웅장한 앙코르와트 사원도 현재와 같은 위용을 뿜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배급 식량으로서의 물고기의 힘을 증명하는 고고학자의 말이다.

한편 바다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종류의 생물이 살아간다. 많은 생물들 가운데 인간에게 유익한 물고기로 살아남은 것은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명태도 유익한 바닷물고기로서 그 명성을 누렸다. 유럽에서 대구는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꾼’ 위대한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 명태는 아주 특별하고 위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명태의 정체성을 찾아 떠난다.

1. 명태가 한반도에 등장한 시기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수산자원이 풍부한 편이다. 그동안 한반도에서 원시사회의 어로활동과 관련한 유물이 발견된 것은 많지 않다. 일부 유적에서 어로생활을 엿볼 수 있는 물고기 뼈가 발견되기도 했다. 신석기 시대 및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발견한 물고기 뼈들을 감정한 결과 명태를 비롯한 대구, 방어, 복어, 참가자미, 숭어, 도미, 넙치 등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명태, 방어, 복어, 참가자미의 뼈는 함경북도에서 발견되었다. 1948년 함경북도 라진시(이후 나선시) 초도에서 조사된 『라진초도원시유적발굴보고서』(1955)에 의해 밝혀졌다. 이처럼 우리의 선조들은 고대사회부터 명태를 잡아 생활해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명태잡이가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창시된 어업으로 믿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총독부 수산과에 근무하면서 당시 명태 연구 전문가로 알려진 정문기(鄭文基)도 그런 주장을 폈다. 그의 주장은 다수의 문헌적 근거로부터 나온 주장이었다.

2. 명태(明太)란 이름에 얽힌 이야기

(1) ‘무태어(無泰魚)가 명태인가’하는 논란= 명태라고 추정할 수 있는 바닷고기가 문헌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함경도 경성도호부와 명천현 토산>에 ‘무태어(無泰魚)’가 등장하는데, 이것을 후대 사람들이 명태라고 여겼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경흥부사를 지낸 홍양호가 저술했다는 『북새기략(北塞記略)』의 <공주풍토기(孔州風土記)>에는 “청어와 대구는 그물로 잡고, 무태어는 낚시로 잡고, 문어는 작살로 잡고, 홍합과 해삼은 갈고리로 취한다.” [捕靑魚、○魚以網, 無泰魚以釣, 文魚以叉, 淡菜、海蔘以鉤](『북새기략』 <공주풍토기>, 한국고전종합DB)고 하였다.

여기서 무태어는 맥락상 명태로 보는 것이 다수의 해석이다. 특히 북새기략은 홍양호가 함경도에 실지 부임하여 현지 실정을 체험한 기록이란 점에서 신빙성을 높이고 있다. 또한 1885년 황필수의 <방약합편>에서 무태어가 명태임을 주장하고 있다. 즉 “무태어는 민간에서 북어(北魚)라고 하는데 북도(北道)에서 나오는 것을 말한다. 명태라고도 하는데, 명천의 태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잡았다” 특히 명태 전문가로 <한국어보>를 쓴 정문기도 무태어가 명태의 별칭이라고 인정했다. 이처럼 ‘무태어가 명태’라는 설명은 논리적인 해석도 아닐 뿐만 아니라 이를 증명하는 자료가 충분하지도 않아 이것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많다. 여기서 섣불리 필자의 견해를 말할 수 없으나, 물고기 이름이 하나로 규정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 <사진 2> <임하필기>23, 춘명일사, 명태(규장각원문서비스)

ⓒ 강원고성신문

(2) 명태(明太)의 유래= 초기 문헌에서 ‘무태어’로 표기되었던 물고기는 이후 명태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등장한다. 명태와 더불어 ‘북어(北魚, 북쪽 바다의 고기)’라는 이름도 함께 나타난다. 명태라는 이름의 유래를 보면 몇 가지 설화가 있다. 우선, 함경북도 명천(明川) 지방의 태씨(太氏)가 낚시로 잡았다고 해서 明太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설화를 전하는 대표적인 문헌은 조재삼의 <송남잡지(松南雜識>(1855)와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1871)가 있다. 두 문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원산도에서 나고, 명천 지방에서는 옛날에는 잡지 않았다. 명천의 태가 성을 가진 사람이 낚시로 처음 북어를 잡았으니 크고 살찌고 맛이 좋아 명태라고 했다. 겨울에 잡으면 동태, 봄에 잡으면 춘태다. 알은 명란이라 한다.[<송남잡지>, 원문은 사진1 참조]

명천의 태씨 어부가 물고기를 한 마리 낚시로 잡아 관청의 주방 관리에게 도백께 드리도록 했는데, 도백이 “너무 맛있다”하며 이름을 물었으나 모두 알지 못하고 “어부 태가 잡은 것입니다”라고만 대답하였다. 이에 도백이 “명천의 태씨가 잡았으니 이름을 명태로 함이 좋겠다”하였다. 이때부터 이 물고기는 해마다 수천 석씩 잡혀 팔도에 두루 퍼지게 되었고 ‘북어’라고도 불렀다. 노봉 민정중이 “300년 뒤에 이 고기가 지금보다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임하필기>, 원문은 사진2 참조]

위의 두 사람이 16년이란 시차를 두고 같은 내용의 명태 유래를 말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그만큼 명태라는 존재가 당시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물고기였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 설화 역시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지도서』의 <함경도 북청(北靑) 물산>에 명태가 등장하는 반면, 명태의 고장으로 알려진 <명천(明川) 물산>에는 명태가 아닌 ’무태어‘만 등장한다. 또한 명태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이후 200여 년이 지나서 ‘명천의 태씨 설화’가 나온 것도 되새겨 볼 지점이다. 특히 민정중의 예언이 오늘날 적중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 <사진 3> 『부북일기』 1645년 4월 20일(국립중앙도서관)

ⓒ 강원고성신문

또 다른 설화는 이렇다. 과거 함경도 삼수갑산(三水甲山, 개마고원 지대) 지방의 사람들이 영양부족으로 눈이 어두운 사람이 많았는데 연안 어촌에 내려가 명태 간유를 한 달 동안만 먹으면 눈이 밝아져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여기서 ‘눈 밝아지는 고기’로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일제강점기 명태 전문가로 알려진 정문기다. 1980년대 언론인 이규태 씨는 자신의 칼럼 <명태와 한국인>에서 이 설이 유력하다고 평가했다. 하나 더 소개하면, 함경도 지방에서 명태의 간으로 등(燈)기름을 내어 사용하면서 어둠을 밝혀주는(明) 큰 고기(太)란 이름이 탄생했다는 설이다. 이것들은 민간의 설화에 불과하다.

한편, 명태라는 말이 여진어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소개한 사람도 있다. 유득공은 『고운당필기』에서 “한 곳에서 생산된 뒤에 팔도로 두루 퍼지는 것은 바로 북해의 명태다. 이 물고기는 수가 매우 많은데 북어(北魚)라 불린다. 몸은 길고 비늘은 가늘며 색은 조금 검다. ...이 물고기는 함흥 이북에서 나니 고려인들은 그 맛을 보지 못한 듯한데 여진이 독점한 탓이다. 성조(태조)에 이르러 함경도를 개척하면서부터 백성들이 그 이로움을 누리게 되었다. ...뒤에 『화한삼재도회』(1712)를 살펴보니 북어는 처음에 魚+兆(조)라는 글자로 되어 있었다. 또 들으니 북쪽 지방 사람들이 명태라고 하는 것은 여진 말이라고 한다.”는 글을 남겼다. 이처럼 유득공의 북어 이야기는 그동안 학자들이 거의 언급하지 않은 내용이다. 필자가 발굴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 명태가 여진족의 말이라니? 이것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한 지점이다.

↑↑ 연간 명태 어획량(<집 나간 명태를 찾습니다> EBS 제공)

ⓒ 강원고성신문

(3) 최초의 명태 관련 기록물= 명태란 물고기 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박계숙(1569-1646), 박취문(1617-1690) 부자가 함경도 회령에서 생활하면서 겪었던 일을 남긴 『부북일기(赴北日記)』다. 1645년(인조23년) 4월 20일자에 ‘생대구 두 마리(生大口 二尾), 생명태 다섯 마리(生明太 五尾)’란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원문은 사진3 참조] 이 부북일기는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1월 26일 울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명태의 최초 공식기록(국가기록)은 1652년의 『승정원일기』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기록은 강원도의 사정을 알리는 글이라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즉 사옹원(司饔院)에서 승정원에 올린 장계의 내용은 “강원도에서 궁궐에 올릴 진상품 가운데 연어알젓을 대구알젓으로 대납하라고 선장(膳狀)에 써놓았는데 명태알(明太卵)을 보내어 일이 혼란스럽습니다.”인데, 당시 강원도의 명태잡이에 대하여는 다음 회 <간성의 명태 이야기>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함경도 이외의 명태 주산지는 강원도였다. 강원도의 명태 관련 최초의 기록은 간성군에서 나왔다. 조선시대 문인 최창대(崔昌大)가 1691년에 간성의 명태를 읊은 시다. 제목도 <수성가(水城歌)>다. 이 기록으로 간성군이 예로부터 명태의 주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수성가에 대하여는 다음 회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 북어 덕장(<집 나간 명태를 찾습니다> EBS 제공)

ⓒ 강원고성신문

3. 명태(明太)와 북어(北魚)의 차이

명태는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애용되면서 이름에도 변천을 겪어왔다. 한 사물이 이름을 많이 갖는다는 것은 그 사물이 그만큼 인간의 삶과 밀착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명태는 약 50여 가지의 별칭을 가지고 있는 물고기라는 점에서 특별하고 귀한 존재다. 이제 북어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처음 등장할 시기 북어는 ‘북쪽 바다에서 나는 고기’라는 의미로 통용되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마른 명태’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천 과정을 문헌적인 자료를 통하여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다. 앞서 『고운당필기』(연대 미정)에서 유득공((1748-1807)은 ‘북해의 명태를 북어라 부른다’고 했다. 조선 후기 이만영(李晩永)도 백과사전인 『재물보 才物譜』(1798)에서 유득공이 말하는 의미로 북어를 기록했다. 또한 이규경은 백과사전으로 알려진 『오주연문장전산고』(1834년 ~ 1849년)에서 “북어를 속명(俗名)으로 명태라 하고, 봄에 잡으면 춘태, 겨울에 잡으면 동태(冬太)인데, 시장에서는 동명태(凍明太)라고 한다.”고 기록했다.

북어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일제강점기 정문기는 <원산매일신문>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6백년 전, 즉 고려시대에 강원도 간성군 연해에서 상당히 많이 어획된 고기가 北魚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그 시대에는 인기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함경북도에서 어획되어 명태어(明太魚)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으며, 세상에 널리 퍼져 유용한 어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고 하였다. 즉 북어라는 이름은 간성군에서 오래전에 이미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문헌적으로 그 전거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북어의 고려 기원설 같은 이야기다.

↑↑ 2014년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해양수산부 제공).

ⓒ 강원고성신문

이제 북어의 다른 의미를 살펴보자. 오늘날 북어는 ‘마른 명태’로 통한다. 이런 의미를 처음으로 기록에 남긴 사람은 1820년 『난호어목지 蘭湖漁牧志』를 쓴 서유구다. 그는 명태를 한자로 명태어(明太魚)라고 쓰고 “속칭 생것은 명태, 말린 것은 북어라고 한다. 명태가 다산하여 전국에 넘쳐나며 우리나라 수산물 중에서 명태는 청어와 더불어 가장 많이 나는 고기다.”라고 하였다. 19세기 초에 이미 북어의 의미 변천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속>

※이 글은 주강현의 『명태평전』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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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고성신문

본지는 ‘고성명태傳’이라는 제목으로 고성문화원 고성학연구소 이성식 연구원의 글을 연재한다. ‘명태의 고장’으로 유명한 고성지역의 명태 관련 풍속과 명태의 기원을 살펴보고, 해방 전후부터 6.25 한국전쟁과 분단 이후 현재까지의 명태 조업 관련 이야기 등을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심도 있게 다루며 명태를 통해 우리의 삶이 더 확장되는 경험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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