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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의 이로움은 38선의 장벽마저 무색하게 하였다

고성명태傳④ 명태는 왜 38선을 넘어야 했는가

2026년 07월 01일(수) 09:00 [강원고성신문]

 

↑↑ [그림1] 길 위의 38선과 소달구지 월남(1947년 5월)[뉴시스, photo@newsis.com,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소장]

ⓒ 강원고성신문


1. 해방과 38선

일본의 대륙침략으로 발생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자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국의 독립 문제를 논의했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그 한 맺힌 ’38선‘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도 찰나였다. 8월 22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면서 소군정(蘇軍政)이, 9월 9일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미군정(美軍政)이 실시되었다. 먼저 들어온 소련군은 즉시 38선에 경비초소를 개설하고 뒤이어 미군 역시 경찰과 함께 남북왕래를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남북을 이어주던 12개의 강, 75개의 하천, 6개의 철로, 8개의 국도, 15개의 지방도, 104개의 시골길이 끊기고 말았다.

“해방되자 맨 처음 소련군이 여기 와서 점령했어요. 근데 며칠 있다가 아군들이 미군과 함께 들어와서 ‘여기가 38선이다’ 이랬다고. 원래 소련군이 욕심을 내서 여기를 차지하고 있다가 뺏긴 거지.” (MBC, 2022. 1. 1. <분단의 상징 38선의 흔적을 찾아서>)

이것은 동해안 38선 마을로 알려진 양양군 현북면 잔교리 주민의 증언이다. 애초의 38선은 관념의 선이요 불가시(不可視)의 선이었다. 말뚝이 서 있는 곳 이외에는 어디가 38선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떤 마을은 절반씩 남북으로 갈리기도 했으며, 한 집에서도 방과 부엌이 남과 북으로 쪼개지는 경우가 있었다.

2. 38(밀)교역과 명태

1. 아직 38선이 갈라지고 남북왕래가 차단되었다고는 하나 남북은 38선 언저리에서 물물교환의 거래를 했다. 남쪽에서는 고무신 따위가 가고 북쪽에서는 북어 따위가 내려왔다. [고은의 자전소설, <나의 산하 나의 삶> 경향신문, 1990.
11.15.]

2. 황혼이 짙어진 38선에는 오늘도 등짐장사 상대(商隊, 상인 대열)가 감시의 눈을 피해가며 숨어들고 있다. 이 땅이 두 동강으로 나누어진 지도 이미 4년! 슬프다 철의 장막 38선은 언제나 부서지려는가! 이 철의 장막이 생긴 후 사람의 왕래는 물론 물자의 교류가 두절 되자 소위 남북교역이라는 일종의 기형적인 직업이 등장하였으니 이것이 즉 ‘38 등짐 장사꾼’이다. 그들이 진 바랑과 보퉁이 속에는 과연 어떠한 것이 들어 있을까? 우선 월북하는 바랑에는 베니세링(페니실린), 다이야찡(고약), 구와니찡, 다야소류, 금게랍 등등 의약품을 비롯하여 쌀, 밀, 밀가루 등 잡곡, 광목, 고무신, 생고무, 털실, 유황, 아연화, 아르미늄 제품, 못(釘), 그리고 담대 큰 장사꾼은 다이야 심지어 부속품까지를 육지로, 혹은 연하(沿河)의 뱃길을 이용하여 실로 막대한 수량이 연속부절 이 길을 넘어 북으로 북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월남하는 물자를 보면, 양초가 제일 많고, 북어, 오징어, 빙초산, 비료, 비누 등을 볼 수 있다.(그림5 참조)[동아일보, 1948.10.10.<동아감찰대>]

↑↑ [그림5] 38선 넘는 등짐장사꾼(동아일보, 1948.10.10.)

ⓒ 강원고성신문



고은의 소설은 38선과 남북의 교류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문장이다. 다음 인용문은 38선 등짐 장사꾼(보부상)들의 행렬을 취재한 기사로 남북물자교류의 단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38선을 경계로 이루어진 남북물자교류는 처음에 민간 보부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어 정부의 허가로 선단을 조직한 대규모 교역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일정 시기 남에서 부족한 전기를 사용한 대가로 북에 제공되는 물자교류도 있었다. 이렇듯 남북물자교류를 통칭하여 ‘38무역’, 또는 ‘38밀무역(밀교역)’ 등으로 표현한다.

당시 교역의 특징은 철저히 ‘물물교환’이었다. 교역장소는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고, 38선 상의 여러 곳(여현, 개성, 청단, 동두천, 주문진 등)에서 이루어졌다. 38(밀)교역에서 육로교역의 장소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곳은 여현(礪峴)이었다. 개성 북방의 여현은 경의선이 통과하는 작은 역이다. 여현역의 북쪽 창고에는 남한으로 내려보낼 북어(명태)와 시멘트 등이 가득 쌓여 있고, 남쪽 창고에는 북쪽으로 보낼 약품, 옷감, 모빌유 등이 쌓여 있었다. 거래는 중개인(브로커)을 내세워 남북을 오가며 흥정하였다. 예를 들면 페니실린 몇 병에 시멘트 몇 포, 모빌유 한 깡통에 북어 몇 쾌(두름) 하는 식이었다. 월남하려는 사람들은 여현 인근 마을에 머무르면서 상인들에게 미리 돈을 건네고 낮에는 숨어 있다가 새벽 4시 소련군의 교대 시간을 틈타 일제히 남쪽으로 질주했다. 소련군 역시 상인(중개인)으로부터 돈을 챙기고 있었다.(이청, 「남북물자교류의 어제와 오늘」)

남북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1948년이었다. 이 시기 건명태(북어)의 교역량은 최대였다. 물론 공식적인 통계에 잡힌 교역량만을 추계할 수 있고, 밀교역으로 넘어온 명태는 수를 헤아릴 수 없다. 1947년 5월 정부가 38밀교역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이후 12월까지 북으로부터 반입된 명태(북어)는 육로 500태(바리, 1태 100두름, 2,000마리), 해로 169태로 육로교역이 더 확대되었다. [『상공행정연보』(1947년도), 장화수의 「남북경제교류」 참고]
이후 1948년도에는 총 7,391태로 금액은 147,000,000원이 되었다. 거래액으로 볼 때, 비료(212,500,000), 카바이드, 양회(시멘트) 다음으로 많은 액수다. 30여 개의 반입 물품에서 보면 북어의 비중은 압도적이다. 해산물로는 오징어 반입도 있으나 22,800,000원에 불과한 수준이다. 특히 전체 교역금액을 비교하면 북으로의 반출금액보다 남으로의 반입금액이 약 3배 많다는 점도 눈에 띈다. 숨은 밀교역을 고려한다면 남북교역의 격차는 더 클 것이다. 자세한 남북교역 품목은 아래 그림 <그림3, 4>를 참고해 볼 수 있다.

한편 남북교역은 당국의 허가를 받거나 밀교역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38선을 통제하는 관계자들의 영향력이 성패에 크게 작용했다. 이러한 사정은 남과 북에서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북어와 관련한 남북의 비위 사례를 들어보자. 북에서는 38선을 통제하는 인제군 내무서장(경찰서장)이 월경하던 북어를 압수하여 직접 빼돌린 사건이 있었고, 남에서는 중서부 38선 경비를 담당하던 육군 1사단장이 북어를 압류하여 임의로 처분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1947년 5월 공인되어 오던 남북교역이 중단(1949.4)되는 사태로 발전하였으며, 상인 편에 섰던 육군참모총장과 ‘군의 매국행위’를 규탄했던 사단장이 동시에 예편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처럼 남북물자교류의 과정에서 각종 비위 사건이 발생하였다.

1. <인제 내무서 세포 당원이 범한 오류에 대하여>
1947년 11월 함경남도 북청의 한 모씨가 북어 20바리(20태, 2,000두름)를 인제군에서 38 이남으로 월경하려다 적발되어 4바리는 넘겨주고 16바리는 압수당했다. 인제군 내무서는 1948년 4월에 압수품을 절차나 서류 없이 처분하였다. 그러자 북청 사람인 한 모씨는 자기 북어를 법적으로 정당하게 몰수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돌려 달라고 검찰소에 신소(申訴)한 일이 있다. 따라서 내무서장 손 모 동무의 책벌을 도당 상무위원회에 위임하기로 결정한다.
[북조선로동당 강원도 인제군당 상무위원회 회의록 제12호(1948.5.28. 작성/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그림3] 북한으로 반출된 물품(매일경제, 1972.8.15.일자 <남북교역백서>)

ⓒ 강원고성신문


↑↑ [그림4] 1948년 남한으로 반입된 물품(매일경제, 1972.8.15.일자 <남북교역백서>)

ⓒ 강원고성신문



2. <북어 압류사건>
1949년 초 남북교역은 육군참모총장의 허가사항이 되었다. 일부 군인들이 교역에서 흘러나오는 ‘떡고물’로 적지 않게 부패하고 있었다. 육군 제1사단장 김석원 대령은 이에 대한 불만으로 1949년 2월경 남쪽으로 넘어와 창고에 쌓여 있던 북어(명태) 20트럭분(시가 3천만 원)을 압수하여 일부는 사병들의 부식으로, 일부는 박격포탄을 짊어지고 고지로 나르는 민간인들의 수고비로, 일부는 남대문시장에서 사병들의 음료로 교환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당시 참모총장인 채병덕은 상인들의 편을 들어 김 사단장을 내사하게 되었고, 결국 이 사실이 이승만 대통령까지 보고되어 두 사람 모두 예편하는 사태를 맞았다.(이청, 「남북 물자교류의 어제와 오늘」, 국립중앙도서관)

3. 고성·양양지역에서의 38밀교역

양양군 손양면 상운리(기사문리 북쪽 마을)에서 태어난 김 모씨(93, 인흥리 거주)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되자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통제하고 있었고, 38 이남에는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김 씨는 38선 이남으로 건너가 산나물을 뜯기도 했었고, 때로는 쌀이나 명태 2두름 정도를 이고 주문진 시장에 가서 화장품, 옷감, 신발, ‘간스메’(통조림) 등을 바꿔왔다. 명태 2두름이면 옷 2벌 정도 바꿀 수 있었다. 당시 먼 친척인 아주머니는 만주에서 내려와 지내면서 쌀, 명태 등을 가지고 38선을 오가며 장사했다. 또한 인근 마을에는 38선 길 안내를 해주고 돈을 챙기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고. 그들은 소 한 마리씩을 살 정도로 수입이 굉장했다고 한다.

당시 양양군 죽왕면 가진리에 거주하던 필자의 아버지도 소유하고 있던 목선(돛단배)을 이용하여 38선 넘어 주문진항에 몰래 잠입하여 밀선교역(密船交易)을 감행했다. 주로 명태와 오징어 등을 싣고 가서 옷감, 신발, 의약품, 기타 생활용품을 가져왔다. 밀선 항해는 주로 심야를 이용했다. 38 이남으로 나갈 때는 불상사를 염려하여 늘 혼자 탑승하고 다녔다. 해방 직후부터 3년 정도 드물게 간헐적으로 다녔으며, 직업인 장사꾼으로 다닌 것은 아니고 생활용품을 바꿔오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해방 직후부터 동해안에서도 수많은 배들이 38선을 넘나들었다. 월남하거나 월북하려는 자들은 야간에 배를 이용하여 월경하였다. 또한 남북을 오가며 밀교역으로 이익을 챙기려는 상인들이 선단을 조직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특히 양양군과 고성군은 38선이 근거리에 있어 배로 쉽게 월경할 수 있었다.

↑↑ [그림2] 9개의 월남 루트(윤태옥, 중앙선데이, 2022.7.9. 그래픽=박춘환 기자)

ⓒ 강원고성신문


4. 명태의 이로움과 남북 수요공급의 불균형

“명태어는 북해에서 나는데 마른 것이 젖은 것보다 맛이 좋으며, 붉고 윤이 나는 알로 젓을 담글 수 있다. 매년 북쪽의 큰 도회지 원산(元山)으로 실어 보낸다. 무릇 깊고 궁벽한 산골짜기의 외지고 누추하며 으슥한 곳이라도 반드시 이것으로 손님을 대접하고,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데 쓴다. 사통팔달로 통하는 큰길가의 번화하고 조밀한 곳이라도 반드시 이것으로 안주와 반찬을 삼는다. 도회와 시골, 귀하고 천함에 상관없이 명태어를 쓰니 그 이로움이 매우 크다. 사해 바다에 사는 어종이 1만에 가까운데 명태어의 이로움과 경쟁할 만한 것이 없으니, 어쩌면 그리 성(盛)하고 잘 번식하는가?” [성해응(1760-1839), 『낮은 자리 높은 마음』, <최고의 생선 명태(北海魚族記)>, 태학사(2015), 118쪽]

조선 후기 학자 성해응의 문집, 『연경재전집』에 실린 글이다. 조선 후기사회에서 명태의 명성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방방곡곡 자리마다 명태는 이로움으로 세상을 물들였다. 예로부터 명태의 주산지는 함경도와 강원도다. 산지에서 생산되는 명태(북어)는 철도와 선박을 이용하여 전국으로 대량 운송되었다. 그런데 해방을 맞자 38선으로 남북의 교류는 멈추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38무역(교역)’, ‘38밀무역’이었다. 이 교역에서 명태(북어)는 주요 품목의 하나였다. 그 이유는 명태의 주산지로 알려진 함경도와 강원도의 어장이 38 이북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38 이남에서 명태의 산지는 강릉, 묵호, 삼척 정도였다. 이곳에서 명태의 생산량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남한의 북어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니 북어의 가치가 치솟고, 월남하는 사람들이 북어 봇짐을 지고 38선을 넘었던 것이다. 당시 38 이남에서 북어의 가격 변동을 살펴보자.

자유신문, 1945.12.8.일자 북어 1쾌 18원이고, 계란 10개도 18원이었다. 그런데 조선일보, 1946.6.3.일자 북어 1연(連) 75원이고, 계란 10개는 47원이었다. 동아일보, 1946.12.26.일자 북어 20미 160원이고, 계란 10개 85원이었다. 서울신문, 1947.1.25.일자 북어 20마리 230원이고, 계란 10개 135원이었다. 조선일보, 1949.1.23.일자 북어 1쾌 400원이었다. 동아일보, 1949.10.3.일자 북어 1쾌 830원이고, 고무신 1족 350원이었다. 그런데 6.25한국전쟁 직전에는 물가가 최고치였다. 경향신문, 1950.3.5.일자 북어 1쾌 1,600원이고, 약주 1되 450원이었다. 그러니까 해방 이후 북어의 가격은 18원에서 1,600원까지 치솟았다. 북어는 38 이남에서 그야말로 금태(金太) 대접을 받았다.

이처럼 명태의 가격 폭등은 그 이로움에 대한 갈구가 증폭되어 시장의 수요로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멈출 수 없는 명태의 38선 잠행으로 이어졌다. 성해응이 예찬한 명태의 이로움은 38선으로 상징되는 남북의 이데올로기적 장벽마저 무색케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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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고성신문

본지는 ‘고성명태傳’이라는 제목으로 고성문화원 고성학연구소 이성식 연구원의 글을 연재한다. ‘명태의 고장’으로 유명한 고성지역의 명태 관련 풍속과 명태의 기원을 살펴보고, 해방 전후부터 6.25 한국전쟁과 분단 이후 현재까지의 명태 조업 관련 이야기 등을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심도 있게 다루며 명태를 통해 우리의 삶이 더 확장되는 경험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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