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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의 고장 거진’이 우리 땅이 되는 것을 큰 전과(戰果)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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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명태傳 ⑤ 명태지구(明太地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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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18일(화) 08:03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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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복 직후 해변 명태 덕거리(덕장)>(조선일보, 1957.1.29.). | ⓒ 강원고성신문 | |
1. 고성의 ‘수복(收復)’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발발 직후 38 이북의 고성지역은 평온했다. 그러나 7월 이후 미군의 공중폭격이 시작되면서 전쟁의 공포 속으로 빠져들었다. 유엔군의 반격과 더불어 국군은 10월 3일경 간성을 점령하였다. 이즈음 국군의 북진이 다가오자 많은 고성주민은 북으로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일부 주민들은 발길을 남으로 돌려 마을로 복귀하였으나 대부분은 가족과 함께 북으로 가고 말았다. 북진하던 유엔군과 국군은 압록강과 함경북도 끝에서 중공군의 참전을 맞닥뜨렸다. 이것이 ‘1.4후퇴’ 였다. 이러한 전황으로 고성주민들은 다시 남으로 피난을 가기 시작하였다. 일부 주민들은 멀리 삼척, 울진까지 피난을 가기도 했다. 당시 38선 이남까지 후퇴하였던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북진을 시도하여 1951년 5월이 되어 간성을 다시 탈환하였다. 이때부터 간성 이북 지역은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치열한 전투지역으로 변했다. 따라서 모든 고성주민은 5월 중순 군의 소개령에 따라 일제히 남으로(양양)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이어 6월 말 ‘1차 수복’으로 삼포리에 ‘귀농선’(민간인통제선)이 설치되어 죽왕면 문암리까지 복귀할 수 있었고, 7월 4일부터 양양군(토성, 죽왕면 포함) 지역은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한편 간성지역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끝나고 1954년 4월 이후가 돼서야 민간인 입주 영농이 허가됨에 따라 양양군 내의 각 읍면에서는 입주 희망자(원주민) 조사 등록을 실시하였다. 이즈음(3/23) 고성군민회를 조직하고 간성면 유지 50명으로 구성된 복귀준비위원회까지 조직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간성지구는 유엔군과 미군의 통제하에 있으면서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1954년 8월 15일 고성군청이 설치되고 첫 고성군수가 미군정으로부터 임명되었다. 군수는 북고성 출신의 피난민 장명준(당시 64세)이었다. 이날 군청에는 1차적으로 복귀한 어민(550명) 등 관민이 참석한 가운데 ‘고성독립’을 기념하였으며, 때마침 북천교가 준공되어 초도식(初渡式)을 거행하였다. 이때 복구된 북천교는 오늘날 ‘합축교’의 모습이었는지, 혹은 일부 구간이 나무다리(木橋)로 복구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954년 8월 15일 이후 간성을 비롯하여 거진, 대진의 주민들이 온전히 복귀한 것은 10월 이후였다. 미군정으로부터 대한민국의 행정 수복도 1954년 11월 17일에야 실현되었다. 앞서 10월 21일 공포된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군명은 ‘고성군(高城郡)’으로 확정되고 간성면, 거진면, 현내면, 수동면(주민 거주 불가)이 대한민국의 행정체제에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2. 수복지구(收復地區)와 명태지구(明太地區)
1951년 6월 고성지역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즈음 서부전선에서는 휴전 협상 문제가 논의되었다. 당시 ‘휴전선을 어떻게 그을 것인가’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결국 1951년 11월 ‘협정 조인 당시의 접촉선’으로 잠정 합의되고 1차 예정선이 제시되자 국민적인 관심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남강(南江), 신대리, 거진, 간성, 양양이 우리한테 들어왔다. 청간정으로 유명한 간성, 낙산사로 이름 있는 양양, 명태도 잽히는 거진은 이제부터 우리 땅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8.15 이후 5년 동안이나 그리워하던 금강산은 잃고야 말았으니 통일이 된 후에야 비로소 금강산 구경도 하게 되었다.”(조선일보, 1951.11.29.)
1951년 7월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한 공식 정전회담이 개성에서 처음 열렸다. 11월 27일 잠정 협의안이 나오자 언론의 반응은 동부지역에서 금강산을 되찾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남기면서도 ‘명태의 고장 거진’이 우리 땅이 되는 것을 큰 전과(戰果)로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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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복지구 간성의 새해 아침>-전쟁의 아픔을 딛고 고향마을로 돌아와 맞은 새해 아침의 표정(경향신문, 1955.1.1.) . | ⓒ 강원고성신문 | |
1951년 6월경 ‘1차 수복’으로 귀농선이 설치된 삼포리 이남에만 거주가 허용되었기 때문에 간성지역 피난민들은 천진, 아야진, 괘진(문암2리), 망개(문암1리) 등 해안 일대에 주로 거주하였다. 그렇지만 각종 해산물이 풍부한 동해의 38 이북 바다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어로작업이 허용된 것은 1952년 12월이었다. 그것도 ‘데구리배’(기선저인망)에 한해서 조건부로 허용하는 정도였다. 점차 바다가 열리면서 피난민들의 어로작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시기 어촌에서는 ‘양미리’, 명태, 꽁치잡이, 미역 채취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명태잡이는 주로 낚시 바리였다. 아직 그물은 사용하지 않던 시절이다. 명태 낚시의 미끼는 양미리와 꽁치 등을 소금에 절여 사용하였다. 겨울 명태와 함께 여름의 오징어잡이는 피난민의 시름을 덜 수 있는 희망의 끈이었다. 1954년 수복 당시 거진항은 원주민과 월남 피난민(30% 정도) 등 200여 가구가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들의 생계 수단은 주로 2, 3톤짜리 돛단배(목선) 십여 척에 의존하는 수준이었다.
수복 직후 1954, 55년 명태잡이 상황을 보면, 아야진 등 속초에서 명태 어획고는 그 비율이 전체 어획고의 72%를 차지할 정도이고 38 이남에서 처음으로 명태가 많이 잡히자 부산을 비롯하여 남해, 서해안에서 300여 척의 ‘데구리선’과 발동선이 모여들었다. 1955년 겨울 거진과 대진항에서는 명태 풍어로 매일 1만 1천 두름(110 바리)을 잡아들이면서 가격이 폭락하여 1급당(20마리) 716환에서 343환에 거래되었을 정도였다. 소형 돛단배 몇 십 척으로 잡아들였으니 항만시설 없이 낡고 헤진 잔교(木橋) 하나로 버티던 항구가 가득 메워질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 땅을 되찾다’는 의미의 <수복지구>는 대체로 ‘38선 이북에서 휴전선 이남’의 지역을 말한다. 특히 수복지구 고성군은 남북 고성군으로 분할되면서 행정적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분단 및 통일의 상징성을 대표하고 있다. 더구나 예로부터 명태의 주산지로 알려진 거진, 대진항을 되찾았다는 것은 ‘명태지구의 등장’이란 점에서 남한 수산업발전의 새 이정표가 되었다.
전쟁 이후 ‘수복지구(收復地區)’가 되면서 대한민국 명태잡이의 최전선으로 급부상한 대진, 초도, 거진, 가진, 공현진, 오호, 문암, 아야진, 속초 등은 ‘명대지구(明太地區)’라는 새로운 별칭을 부여해도 좋을 듯싶다. “북로(北路)의 백성들은 오직 명태잡이로 1년의 생계를 삼는다.”(『승정원일기』 영조5년 기유, 1729년 11월 5일)고 했다.
3. 명태 장사에 뛰어든 군대, 후생사업이 뭐길래?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대한민국 국방부는 재정상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지 못했다. 수많은 전쟁 물자가 유엔과 미국으로부터 원조되었다. 이러다 보니 군 장교들의 봉급은 물론 장병들의 급양비마저 충분치 못한 실정이었다. 이렇듯 군대의 부족한 예산을 벌충한다는 명분으로 용인된 것이 ‘군의 돈벌이’였다. 이를 포장하여 ‘후생사업(厚生事業)’이라 명명하였다. 후생사업은 한국전쟁 때부터 묵인돼왔으며, 1955년에 절정을 이루면서 ‘군내 부정의 대표적인 해’로 꼽을 정도였다. 군대가 벌일 수 있는 돈벌이는 다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후생사업의 방식은 부대 차량이나 중장비의 활용(직접 운용하거나 민간인에게 대여), 장병이 취업하여 돈을 버는 방식(‘몸둥이 후생사업’), 보급품의 교환 등 다양했다. 구체적인 사업을 보면, 산림벌목[특히 소나무 남벌로 목재 장사, 1950년대 산림 황폐화의 원인, 그래서 붙은 별명이 ‘송충이 (부대)’], 건설사업, 각종 고철 수집 판매, 군수품 암매 행위, 동해안에서 군용 트럭을 이용한 명태 등 해산물 장사, 산나물채취, 장병이 취업하여 부대에 월정액을 납부케 하는 행위, 민간인과 결탁한 상행위 등이다.
당시 동해안에서 실행된 대표적인 후생사업은 군용 트럭을 이용한 명태장사, 소나무 등 산림벌목(남벌), 전방지구에서 해녀를 동원한 해산물 채취 등이었다. 고성지역은 수복지구이면서 전방지대라 더욱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건봉사 일대의 울창한 총림이 사라진 것도 후생사업 때문이요, ‘수복’ 후 명태의 주산지로 알려진 거진, 대진, 아야진, 속초 등에서 명태를 실은 수많은 군용 트럭이 전국을 누비게 된 것도 후생사업이었다. 제주도에서 100여 명의 해녀들을 모집하여 민통선 해안, 어로저지선 너머에서 해산물을 채취한 것도 후생사업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제주 출신의 해녀는 특수부대 소속으로 집단생활을 하며 제진 인근 바다에서 작업을 하다 동료가 익사한 사고도 겪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성지역의 후생사업에 관한 기록은 따로 없다. 필자가 수집한 자료는 경험자, 혹은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존한 것이다. 이제 증언하신 분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고성지역의 후생사업은 1954년 수복 전후하여 4, 5년간 지속되었다. 한 증언에 따르면, 속초항에는 특수부대에서 운영하는 2척의 ‘데구리배(기선저인망)’가 명태를 잡았다. 또 다른 증언은 1954년경 천진리 병기부대가 해체되면서 임대하여 사용하던 군용 트럭을 구입하여 오랫동안 명태 장사를 해왔다고 한다. 명태철이 오면 진부령 단일로에는 명태를 실은 군용 트럭들이 줄을 이었다. 당시 민간 차량이 부재하던 시절이라 화물운송은 거의 다 군용 트럭이었다. 심지어 장사에 밝은 동네 아낙들까지도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명태 장사를 벌이기도 했다. 겨울철 어촌마을 게딱지 같은 집에도 작은 덕거리는 눈에 띄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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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거진항 잔교(木橋)에서 명태를 나르는 여인>(1962년 개선된 잔교 모습) (경향신문, 1962.3.11.). | ⓒ 강원고성신문 | |
당시 명태의 후생사업과 관련하여 국가적 재난이 발생한 일도 있었다. 1954년 1월 31일, 경부선 오산역에서 동해안의 명태를 가득 싣고 달리던 보병학교 군용 트럭이 열차와 충돌하여 54명이 사망하고 130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다. 백선엽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육군참모총장 재직시절에 이 열차 사건이 발생했으며, 군내 후생사업의 비리 문제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대책을 요청하였으나 대통령은 ‘군인이 돈맛을 알면 어떡하나. 군인은 발런티어(자원봉사)이고 서비스하는 거야’라면서 무시했다고 전한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군은 이승만의 거대한 정치조직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정치자금의 주된 공급원이 되었다.’(양병기, <한국 군부의 역할과 공과>) 이처럼 “전쟁 직후에 고급 장교들이 고철 수집과 벌목 등 후생사업을 통해 치부하고, 각 부대의 간부들이 사병들의 몫을 횡령, 착복함으로써 훈련소 같은 곳에서는 훈련병의 사망률이 높아 원성을 사고 있었다.”(한용원, <군부의 제도적 성장과 정치적 행동주의>).
이처럼 군내의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후생사업은 1958년 송요찬 1군사령관이 부임하면서 뿌리가 뽑히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박정희, 채명신 등이 사령관을 도왔다는 후문이다. 채명신은 당시 국회, 언론, 수사기관 등에서는 후생사업의 <떡고물>이 없어질까봐 반대가 심했다고 회고한다.
한편 후생사업으로서의 고철 수집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고성지역은 1935년(고성-간성)과 1937년(간성-양양)에 각각 개통되어 한국전쟁 시기까지 운행되었던 동해북부선 철도가 있었다. 그런데 이 철도의 주요 시설인 역사와 철교는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철로는 일정 기간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54년 간성 수복 이전에 철로는 일제히 사라졌고, 거진을 비롯하여 몇몇 정거장에는 갈 곳을 잃은 시커먼 기관차만 덩그러니 마지막 성채처럼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것마저도 얼마 후 누군가의 손에 의해 고철로 뜯겨나갔다. 과연 동해북부선 양양-초구역 구간의 철로는 어떤 과정을 거쳐 누가 철거한 것일까? 이 질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다만 추측만 무성하다. 당시는 유엔군 통제 아래 미군정 시절이고 전쟁 노획물로서의 철도시설을 처리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1951년 말 정부는 미국과 10만 톤의 고철 수출 계약을 맺고 전국적으로 고철 수집에 나서기도 했다. 이 정도면 부대 장병들의 급양비를 개선하고 최저생활의 유지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후생사업의 명분과는 거리가 멀 듯 싶다.
지금 동해북부선이 살아 있다면 엄청난 지역 유산이면서 관광자원이 되었을 것이다. 한때 정부는 이 철도의 필요성을 깨닫고 복구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959년 말 3개년 계획으로 북평-간성 구간을 건설한다는 꿈같은 계획이었다. 그러나 북평-강릉 구간만 개통되고 강릉-간성 구간은 박정희 정권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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