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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로저지선 남하 결정은 어민들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고성명태傳 ⑥ 명태잡이와 납북어부(1)

2026년 10월 17일(토) 09:37 [강원고성신문]

 

↑↑ [그림1] 어로저지선 전폐 후 조치(38도 35분 45초) (조선일보, 1957.11.17.)

ⓒ 강원고성신문


1. 동해안 최초의 ‘어부와 어선 납치사건’

동해안에서 북한에 의한 어부와 어선 납치사건이 처음 발생한 것은 1957년 11월 9일이었다.

“명태잡이를 갔던 기범선(機帆船) 8척이 휴전선 근방에서 괴뢰선에게 납치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지난 9일 하오 4시경 휴전선 근방인 고성군 현내면 저진[동아일보 11.13일자에서는 <제진>으로 표기함] 앞바다 해상 약 12마일 지점에서 선적을 거진에 둔 어성호, 덕길호, 구우호, 해룡호, 장복호, 궁지호(경향신문,11.13일자에는 용진호로 표기) 등의 5척과 선적을 주문진에 둔 물새호, 동어호의 2척, 그리고 마산에 선적을 둔 궁지호 등 8척이 고기를 잡다가 괴뢰선에게 납치당해 갔다는데 이 8척의 배에 탄 선원은 47명으로 알려졌다. 11일 하오 해군본부에서 이 사건을 확인 공표하였다. 발표에 의하면 9척의 우리 낚시배들이 조업 중 3척의 괴뢰선이 나타나 8척을 납치하고 <어성호>란 배 1척만이 탈출 귀환하였다.”(조선일보, 1957.11.12.)

그런데 사건 발생 사흘이 지난 11월 12일(경향신문, 조선일보)이 돼서야 관련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기사에서는 “11일 해군에서 진상조사단을 현지에 급파했다”고 했다. 또한 해군참모총장은 12일 ‘어선 납치 사건’을 공식 발표하면서 ‘한국 해군의 전력 보강’을 담화로 발표하였다. 그만큼 안보 위기를 초래한 사건으로 인식했다. 한편 14일에는 북한 평양방송이 이를 보도했다.

“11월 9일 어선으로 위장한 약 40척의 한국 해군함선이 (북한) 해금강 근해에 들어왔다. 이에 (북한) 순찰대가 경고 신호를 보냈는데도 육지로 접근하였으며, (북한) 정찰대가 남한 함선에 승선하려고 하자 48명을 태운 8척의 선박 외에는 모두 도주하고, 8척은 남아 있었다.”(조선일보, 1957.11.16.)

당시 납치(납북)된 어선의 위치에 대하여는 남북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다. 11월 14일자 북한 평양방송은 “해금강 근해에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엔군 조사단의 입장은 “어선들은 남한에 인접한 해상에서 어로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경향신문의 보도(1957.11.16.)에 따르면, 당시 어로저지선은 북위 38도 26분(거진항 이남)이었다. 그런데 우리 어선은 당시 “제진 앞바다 해상 12마일(북위 38도 33분 정도로 추정)” 지점에서 납치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납북 어선들은 어로저지선을 넘어 월선조업을 한 셈이다. 그러나 해상 군사분계선(북위 38도 36분 45초)을 넘은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은 남한의 해군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사건 사흘이 지나자 해군참모총장은 ‘한국 해군의 전력을 보강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당시 북한은 어선 납치에 동원된 쾌속정(시속 30마일)을 여러 척 보유하는 등 해군력을 이미 보강한 상태였다.
사건의 후속 조치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동안 시행해오던 어로저지선을 전폐하기로 하였다. 종래 어로저지선은 북위 38도 26분(거진) 이남 해상으로 제한되었다. 해군은 11월 15일부터 어로저지선을 전폐하고 북상 조치하였다.(경향신문, 1957.11.16.) 이 조치로 확장된 어로 구역은 [그림1]과 같다.

[그림1]에서 보듯이 해상 휴전선 바로 아래까지 올라간 것이다. 어로 구역의 확장으로 명태의 어획량은 급증했다. 당시 해무청의 집계에 의하면, “확장 조치로 명태 1만 9천 톤, 미역 6천 톤, 오징어 3천 8백 톤, 기타 7천 2백 톤 포함 연간 3만 6천여 톤 어획량이 증가되었다.”(동아일보,1959.9.8.) 이처럼 어로저지선은 이후 명태잡이를 비롯한 다양한 어로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생명선이기도 했다. 한때는 해군이나 해양수산당국이 어로저지선의 변동을 통하여 어민들을 통제하기도 했다. 따라서 해양 군사분계선(휴전선)과 어로저지선은 납북어부 문제의 접근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납북사건에 있어 어부들의 귀환 문제는 사태 해결의 본질적인 요소다. 덕길호 등 8척에 승선했던 어부 45명은 납북된 지 14일 만에 귀환하였다. 이들은 장전항을 출발하여 해군의 보호 아래 귀환하였다. 다만 납북자 중 2명(덕길호 1명, 해룡호 1명)은 귀환하지 못했다. 미귀환자들은 모두 고성 출신으로 나이는 44세와 48세이다.(조선·동아일보, 1957.11.25./ 동아일보, 1994.8.10.) 이들의 미귀환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최초의 납북어부 사건에서 귀환하지 못한 어부가 발생한 것은 이후 납북자 문제에 있어 불행한 선례로 남게 되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당시 국방부는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하여 납북사건에 대한 항의를 넘어 납북자 전원 귀환을 목표로 접근했어야 마땅했다.

2. 동해안 군사분계선과 어로저지선

해방 이후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자 민족의 갈등과 분열은 참혹한 현실로 다가왔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 군사분계선(휴전선)으로 갈라선 남북은 또 다른 대립과 갈등으로 빠져들었다. 고성지역은 그 분단의 최전선이 되면서 남북의 대립과 갈등이 주민의 삶 속으로 직접 파고들었다. ‘수복’ 이후 고성의 바다는 고성 주민의 생명선이었다. 그런데 당시 고성 앞바다는 어부들이 온전히 누리는 바다가 아니었다. 고성의 바다에는 최북단으로 ‘해상 군사분계선(휴전선)’이 엄존했고, 그 아래 ‘어로저지선’(현재 동해상에서는 ‘어로한계선’으로 통용됨)이 그어졌다. 이중의 바다 철책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남북은 영역의 보호와 침범 문제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고성 앞바다에 그어진 해상 휴전선은 북위 38도 36분 45초(동아일보, 1966.1.8.)로 알려져 있다. 육지 군사분계선(휴전선)에서 위도상 진동(眞東)으로 그어진 선이라고 한다. 육지의 군사분계선은 남북으로 일정 구간을 비무장지대라는 안전장치를 설정했다. 즉 남북으로 2km씩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으로 그었다. 해상에는 육지와 같은 경계구역과 표식이 분명하지 않다. 서해상에서 논란이 되는 “NLL(북방한계선)”의 문제는 동해상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 다만, 동해상에서 군사분계선이자 휴전선은 경계의 식별이 쉽지 않아 ‘어부와 어선 납북사건’에 있어 핵심 쟁점이 되고 있다.

↑↑ [그림2] 군사분계선과 신구 어로저지선(경향신문,1960.8.30.)

ⓒ 강원고성신문


해군과 해양수산당국은 어민의 안전한 어로 활동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로저지신(현재 어로한계선으로 통칭)을 설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수복’ 이후 처음으로 어로저지선을 설정하고 어부들의 어로 활동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은 1955년 3월이었다. 그동안 동해안 어부들은 휴전선 일대의 고기잡이가 금지되어 있었다. 이제 그 허용선은 북위 38도 26분(거진 이남) 선이었다. 이에 따라 대진항에서도 출항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니까 간성, 거진, 대진의 ‘수복’이 1954년 10월 전후였으니 그해 겨울은 명태잡이가 거진 이남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957년 11월 9일 어선 8척(47명)이 납북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해군참모총장은 어로저지선을 전폐하고 북방 확장을 발표하였다. 이때 발표된 어로저지선은 비무장지대의 남방한계선을 동쪽으로 연장한 북위 38도 35분 45초였다. 해상 휴전선인 38도 36분 45초보다 1분 후방이었다. 거리로는 약 2km 남쪽이었다. 이것이 역사상 어로저지선의 북방 최대치였다. 이곳이 어느 지점인지 아래 그림3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1,638m, 눈 덮인 중앙지점) 아래까지 접근해 있다. [그림3]

↑↑ [그림3] 금강산 비로봉 아래로 북상한 어로저지선(38도 35분 45초)[동아일보, 1962.1.9.]

ⓒ 강원고성신문


그동안 동해상의 어로저지선의 변동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55년 3월 북위 38도 26분(거진 이남)[동아일보, 1955.3.3.일자] △1957년 11월 16일 북위 38도 35분 45초[조선일보, 1957.11.16.일자] △1959년 11월 15일 북위 38도 30분[조선일보, 1959.11.16.일자] △1959년 12월 22일 북위 38도 33분[동아일보, 1959.12.22.일자] △1960년 5월 4일 북위 38도 30분[동아일보, 1960.5.5.일자] △1960년 8월 30일 북위 38도 33분[동아일보, 1960.8.31.일자] △1961년(?) 38도 35분 45초[동아일보, 1962.1.9.일자] ※1960년 12월 고성어민대표가 국회와 해군에 어로저지선을 38도 35분으로 확장시켜줄 것을 진정함(조선일보, 1960.12.26.일자) 이어 얼마 후 확장 조치됨(동아일보, 1962.1.9.일자) △1964년 6월 29일 북위 38도 35분 45초, 어로저지선을 농림부령으로 공포 ※(엄경선,『통곡의 바다 짓밟힌 희망』,2024,민주재단)[농림부가 1963년 11월부터 해상 어로저지선 지도 업무 시작(동아일보,1963.11.4.)] △1968년 11월 23일 북위 38도 30분<5마일 남하>(경향신문,1968.11.23.)[현내면 마차진리 주민 강제 이주 단행] △1968년 12월 1일 동해 어로저지선 환원(38도 35분 45초) 투쟁 결의대회[조선일보,1968.12.3.일자] △1989년 4월 13일 ‘어로한계선’ 북위 38도 30분=> 38도 33분으로 북상[조선일보,1989.4.13.]

이처럼 어로저지선의 변동이 잦았던 것은 어부 및 어선 납북사건이란 북한의 도발 때문이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어부들 역시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었으며, 어로저지선은 명태 어획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로 인하여 어부들의 ‘전방작업’에 대한 모험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3. 어로저지선 5마일 남하의 영향

동해안 어로저지선의 변동과정에서 고성지역 어민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1968년 11월 23일에 내려진 <어로저지선 5마일 남하> 조치였다. 5마일이면 약 9km의 거리에 해당된다. 종전에는 군사분계선 인근 38도 35분 45초였던 어로저지선이 38도 30분(대진 등대 지점)까지 내려온 것이다. 종전의 해역은 명태를 훨씬 많이 잡을 수 있는 구역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어로저지선의 남하(축소) 결정은 어민들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정부 역시 이러한 충격을 예상했다. 그래서 어로저지선 남하로 인한 명태 어획고의 손실을 약 ‘2억’ 원으로 추정하고 보상을 선언했다. 하지만 어민들은 즉각 반발했다. 또한 새로운 어로저지선인 38도 30분 선은 대진 등대를 기점으로 하면서 그 북쪽 마을인 마차진리 어민들은 출항조차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마차진리 어민들의 집단 강제 이주라는 강경책을 썼다. 정부의 추가적인 조치는 또 있었다. 어로저지선을 넘어 조업하는 어부는 반공법으로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 [그림4] 신구 어로저지선(조선일보, 1959.11.16.)

ⓒ 강원고성신문


이러한 강경책의 배경에는 명태 어선에 대한 북한의 도발이 날로 극심해졌다는 판단 때문이다. 실제로 1961년에는 납북 어선이 24척이었으나, 67년도는 46척(334명)인데, 68년도의 경우는 10월 말 현재 115척(1,139명)으로 증가했다. 납북 어부들의 억류 기간도 1개월 내외에서 5개월, 1년 정도까지 점차 장기화되고 있어 ‘공작원’으로 포섭될 우려가 높다는 안보적인 인식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어민들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어획고의 손실에 대한 보상은 물론 안전조업을 위한 적극적인 보호조치를 요구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명태 어장의 축소라는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책에 대한 불만도 강하게 표출하였다. 당시 상황에 분노한 고성, 속초의 어민들은 12월 1일 속초운동장에서 어로저지선 환원을 요구하는 투쟁 결의대회를 열기도 했다. 어민들은 어로저지선의 남하 결정이 영해에 대한 주권의 포기라며 환원될 때까지 무기한 투쟁을 선언했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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