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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의 독립운동의 가치를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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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칼럼 / 이성식 칼럼위원(고성문화원 고성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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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2일(금) 09:42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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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지난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었다. 1905년 11월 17일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찬탈당한 날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많은 애국지사들이 나라를 위해 순국하였으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9년 11월 17일 ‘순국선열 공동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국가보훈부는 제86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독립유공자 95명을 포상하였다.
이번 포상에서 고성의 독립운동가 서주원(徐周元)이 애족장, 김유호(金維鎬)가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러한 성과는 고성문화원 고성학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진행하고 있는 ‘고성군의 독립애국지사 발굴 사업’의 2025년도 실적이다. 지난해에도 2명의 독립애국지사가 서훈되었다. 이처럼 고성 출신의 애국지사들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위훈을 기리는 일에 지역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역공동체가 하나가 되어야
고성지역의 독립운동은 시대별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초기 ‘의병의 소굴’이었다던 간성의 의병운동(1896)에서 시작된 고성의 독립운동은 봉명학교의 국채보상운동(1907), 간성보통학교의 영동지역 최초의 3.1독립만세운동(1919), 조선민족대동단 활동(1919), 철원애국단 활동(1919), 수성청년회 활동(1921), 고성보통학교 동맹휴학 사건(1923), 신간회 조직(1928), 적색농민조합 활동(1931), 문예비밀결사운동(1936), 기타 학생운동 등 다채롭게 펼쳐졌다. 이것은 계몽운동에서 무장투쟁으로, 민족주의운동에서 사회주의운동으로 폭넓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고성의 독립운동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크게 빛을 발하고 있음에도 우리 지역에서는 이러한 역사적인 업적이 높이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더불어 고성 독립운동의 가치를 재정립하기 위하여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찾고, 전통의 계승과 영향사를 밝히는 작업은 중요한 초석이 되리라 생각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간성군 풍속에는 ‘崇習武藝(숭습무예)’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간성지역은 예로부터 무예를 배우고 숭상하는 풍습이 전승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금강산건봉사에서 사명대사가 700 의승병을 이끌게 된 사건도 이러한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역사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역사는 전통의 그림자를 바탕으로 새롭게 구성되고 해석되는 것이다.
사명대사의 구국적 결행과 사적은 건봉사에 큰 전통으로 계승되어 ‘사명의 법손’이라 자처하는 스님들이 사명대사기적비(1800)를 비롯하여 수충각을 건립하였다. 또한 건봉사 스님들은 간성군의 최초 근대사립학교인 봉명학교(鳳鳴學校)를 설립하면서 독립운동과 서산대사 및 사명대사의 정신을 표방하였다. 봉명학교는 설립 직후 국채보상운동(1907)에 전교직원과 학생 전원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봉명학교는 독립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고성 독립운동의 또 다른 구심점은 수성청년회(䢘城靑年會)이다. 1921년에 창립된 청년회가 간성의 고구려 지명인 ‘䢘城’을 불러왔다는 것은 당시에는 상징성이 매우 큰 사건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19년 5월 15일, 간성군은 고성군으로 군명을 개칭하고 군청마저 간성에서 (북)고성으로 이전하였기 때문이다. 간성지역민들은 천년을 이어온 읍치의 전통을 잃어버린 것에서 오는 상실감이 매우 컸을 것이다. 더구나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감정까지 더했으니. 당시 수성청년회의 창립을 주도한 인물은 박태선이었다. 그는 초대 회장으로 강연회와 토론회를 중심으로 청년회를 이끌었다. 그는 스스로 ‘䢘城人(고구려 정신을 잇는 간성사람)’을 자처하면서 ‘수성청년에게 고함’이란 제목으로 청년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는 ‘수성학원’이란 2년제 학교를 열어 교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건봉사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또한 수성청년회는 활동 범위를 넓혀가면서 강원도청년회를 선도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박태선을 비롯한 수성청년회 간부들은 강원도청년연맹, 봉화회, 관동청년대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뿐 아니라 전국적 조직인 조선노농총동맹, 조선청년총동맹 등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한편 고성 독립운동사에서 상징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정남용과 박태선이다. 이들의 독립운동은 건봉사라는 장소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건봉사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상징적인 인물은 한용운이다. 그가 건봉사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07년이다. 첫 안거수행은 물론 만해라는 법호, 용운이란 법명을 받았던 것도 이때다. 한용운은 건봉사 사적지를 편찬(1928)하기도 하였으며, 건봉사를 오가면서 봉명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불어넣었다.
한용운, 정남용, 박태선 세 사람의 독립운동에서 우리는 어떤 영향사를 찾아낼 것인가. 세 사람은 건봉사와 인연이 깊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한용운과 정남용은 1907년을 전후하여 건봉사에서 구도의 길을 함께 걸었던 사이다. 정남용은 1906년 11세에 건봉사에서 스님 수업을 받았다. 이어 봉명학교를 졸업하였으며, 3.1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고향인 현내면 철통리에서 접하자 곧바로 상경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조선민족대동단이라는 조직에서 활동하면서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망명시키려다 검거되어 징역 5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921년 4월에 순국하였다. 그는 만해 한용운과 친밀한 사이였다. 그들은 독립운동에 대하여 이심전심 통했다고 한다. 그만큼 상호 영향이 컸던 것이다.
한편 박태선은 수성청년회를 결성하기 전에는 건봉사를 오가면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이다.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이전에는 매일신보 통신원과 간성지국장을 지냈다. 그는 언론보도를 통하여 정남용의 순국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정남용이 순국하고 얼마 후에 수성청년회가 창립되었다. 수성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시기 박태선은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려고 애썼다. 1925년 이후 그는 사회주의운동으로 선회하면서 원산으로 이주하여 노동운동에 전념했다. 원산총파업을 이끌었던 원산노동연합회에서 집행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건봉사 관련 기록에 따르면 한용운은 박태선의 사회주의운동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전한다.
한용운, 정남용, 박태선 세 사람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도 큰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다. 이들 3인의 독립운동을 통하여 우리는 전통의 영향사를 배울 수 있다. 고성지역에서 3인이 서로 만나는 장소는 건봉사다. 특히 한용운은 독립운동의 큰 선배로서 정남용과도 당시 동지적인 관계를 유지한 사이다. 이처럼 세 사람은 독립운동사에서 각자 자기 전통을 세우면서도 서로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으로 고성의 독립운동사를 역사와 전통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독립애국지사들의 거룩한 넋을 지역공동체의 이념으로 삼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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