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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로저지선 인근 바다는 늘 긴장감이 감돌았다

고성명태傳 ⑥ 명태잡이와 납북어부(1)

2026년 11월 04일(수) 09:18 [강원고성신문]

 

1. 황금어장과 전방작업의 모험

어부에게 바다는 삶의 전부다. 물고기를 찾아다니는 것이 그들의 생리고 본질적인 욕망이다. 고기 떼를 쫓고 황금어장을 찾아서 배질하는 것이 선장의 사명이다. 그러나 동해안 고성 바다는 선장의 항해와 어로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 바로 해상 군사분계선과 어로저지선 때문이다. 그런데 명태의 황금어장은 이 금단의 선을 넘어서 존재한다.

“여보시오 <갈매기호> 당신들 배는 너무 올라갔으니 내려가시오.” 마이크를 든 젊은 해군 소위님이 목이 터져라 하고 외칠라 치면 고깃배에선 으레, “저어기 바로 저기에 그물을 쳤으니 걷어가게 해주시오.” 하고 사뭇 어리광하듯 떼를 쓴다. 그뿐인가 명태는 어로저지선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많이 잡히게 마련이니 어부들은 거의 필사적으로 달려든다. (동아일보, 1962.1.11.일자)

위의 글은 1960년대 초 동해 어로저지선 일대 해상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광경을 묘사한 내용이다. 1960년대 말까지 어부들은 어로저지선을 넘어가는 것에 큰 죄의식 없이 일상처럼 여겼던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 명태잡이 어부들 사이에서는 위험을 무릅쓴 휴전선 일대의 어로활동으로 ‘전방작업’이라는 말이 상용되었다. 이렇듯 전방작업을 나서지 않으면 명태를 충분히 잡을 수 없다는 인식이 상식처럼 퍼졌던 것이다. 당시 신문 기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북방 깊숙이 진출했던 어선들은 어로저지선 근해에 비하면 3, 4배의 어획을 보이고 있다.”(조선일보, 1960.12.26. <사선 너머로 명태잡이>) 여기서 “북방 깊숙이”라는 것은 해상 군사분계선을 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기사는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명태의 주어장인 휴전선 이북과 이남의 명태 어획비율은 약 15대 2가 되며, 속초, 거진, 대진 등에서 하루 2백여 척이 결사적으로 휴전선(북위 38도 36분 45초)을 넘어선다. 당국의 집계에 의하면 올해 12월 현재 연 928척의 명태잡이 어선이 휴전선을 넘어 위험한 작업을 하다 5척이 납북되었다.”(동아일보, 1964.12.17.) 이 기사의 제목은 <동해의 모험, 고기떼 따라 휴전선 마구 넘어>였다. 관련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지도는 [그림1]이다. 그림에서 황금어장은 해상 군사분계선 북쪽 장전 앞바다(주어장)가 된다. 준어장(북고성 수원단 중심) 역시 군사분계선과 어로저지선에 걸쳐있다.

ⓒ 강원고성신문

[그림1] 명태 주어장을 쫓아 군사분계선을 넘는 어선들(동아일보,1964.12.17.)

1964년 11월에 명태잡이로 납북되었던 명천호 선원 함0용 씨(현내면 거주)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거진항에서 출항하여 어로저지선과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의 수원단 등대 앞까지 들어가서 명태를 잡았다고 진술한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2022년 하반기)『제9권』 <명천호 납북귀환어부 인권침해 사건>에서도 “명천호는 1964.11.16. 오전 4시경 거진항을 출항하여 돌섬 동방 약 8마일 해상에 도착하고 오전 6시 30분부터 조업하던 중 수원단 등대 정면으로 약 8마일 해상(북위 38도 41분 30초)에서 북한 선박 3척에 의해 포위, 납북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필자의 아버지는 1967~8년 거진에서 명태잡이에 종사했다. 고향마을 가진에서 목선(돛단배)을 이용한 명태잡이로는 큰 벌이가 되지 않자, 거진에서 발동선의 선장으로 명태바리를 하였던 것이다. 아버지 역시 전방작업을 모험적으로 감행했으며, 월선조업하다 경비정에 붙잡혀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여러 차례 납북 위기를 모면했던 적도 있다. 해무가 끼는 날이면 해금강의 섬들과 북한 경비정이 구별되지 않아 속기도 했다는 말씀도 기억한다. 그래서 필자의 초등학교 두 해의 겨울방학은 거진에서 보냈다. 서낭당 아랫집에서 셋방살이로 밤늦도록 낚시 찍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아래 [그림2]는 당시 월선조업 어선에 대한 해군의 경고 조치의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 강원고성신문

[그림2] 저진어장 일대 명태잡이배들의 월선조업 경고 장면(동아일보, 1962.1.11.)

ⓒ 강원고성신문

[그림3] 성어기만 허용되는 좁은 명태어로구역(동아일보,1973.11.13.)

1970년대 명태잡이의 어로 현장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림3]에서 보듯이, 명태 어로구역은 더욱 축소되었다. 어로저지선은 38도 30분(대진 등대선)이고, 명태 성어기인 11월 1일부터 다음 해 2월 말까지는 38도 33분인 저도어장까지 제한적으로 북상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제한적으로 허용된 구역에서도 해안(육지)으로부터 4마일까지는 조업금지해역이다. 따라서 극히 일부 구역에서만 명태바리가 가능했다. 속초, 고성 등에서 수백 척의 어선들이 일제히 한 구역에 집중되기 때문에 명태잡이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쟁탈전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는 북양명태가 대량으로 입하되면서 명태 가격이 급락했고, 유류 파동에 따른 그물 값의 폭등으로 일부 어민들은 배를 항구에 묶어 두기도 했다.

2. 명태잡이의 풍경과 상처1 : 납북 과정의 긴장과 죽음의 탈출

북한 해역에 형성되는 명태의 황금어장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접근하려는 명태잡이 어선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비정 사이의 숨바꼭질로 인하여 어로저지선 인근 바다는 늘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루 수백 척의 어선들을 몇 척의 해군함과 경비정만으로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한계적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북한은 기회를 잡아 어부와 어선을 수시로 전투적으로 납북했다. 납북 과정에서 우리 어선들은 납북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따라서 북한은 무력을 동원하여 어부들을 위협하거나 발사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어선이 침몰되거나 어부들이 숨지는 사고가 여러 차례 있었다.

1967년 11월 3일, 동해 어로저지선 인근 해역에서 명태잡이 중이던 어선 200여 척에 대하여 북한의 함정 2척과 쾌속정 7척이 약 40분간 기관총과 다발 총을 난사하여 해양호 등 10척의 어선과 어부 60명을 납북했다. 이 사건은 동해상 어부 피납 사건 중 가장 큰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거진항 어제호 선장은 오른팔에 관통상을 입은 채 탈출하였다.(동아일보,1967.11.4.)

같은 해 12월 5일, 더욱 참담한 사건이 발생했다. 대진항 소속 잠수선(머구리배) 10척이 현내면 송도진리 앞 수백m 해상 휴전선(남방 한계선 남쪽 1백m)에서 작업하던 중 4척이 북괴의 연안 포대의 총격으로 여부 2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명은 바다에 떨어져 실종되었고, 7명은 중상을 입었으며, 중상자 1명이 병원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머구리배 4척의 어부들은 동료 어부 3명이 총탄에 맞아 바닷물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그대로 도망쳐 왔다고 울면서 고백했다.(동아일보,1967.12.6.)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조금 다른 증언을 하고 있다. 당시 위급한 상황에서 한 어선은 동료 잠수부가 물속에 들어가 작업하고 있는 상태에서 생명줄(산소 공급 호스)을 칼로 끊어버리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이것은 필자가 현내면 거주자의 증언으로 확인한 내용이다. 사고 발생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이 아픔은 여전히 주민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같은 날 명태잡이 어선들이 북한 경비정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거진항 영복호 선원 2명이 중상을 입기도 했다.

3. 명태잡이의 풍경과 상처2 : ‘56함’ 침몰과 마차진 주민의 강제 이주

1967년 1월 19일, 동해상 휴전선 부근에서 경비 중이던 해군 ‘56함(당포호)’이 명태잡이 어선의 납북을 저지하려다 북한의 육상포대의 포격으로 침몰되었다. 이 사고로 해군 장병들이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즉 전사 11명, 실종 28명, 중경상 30명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고성지역은 전쟁의 공포 속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56함 부함장이 해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한 사건의 요지는 대략 이러했다.

“1월 19일 오전부터 전국 각지의 명태잡이 어선단이 거진 앞바다로 몰려들었고, 명태 떼를 쫓아 어로저지선 위쪽으로 올라가 휴전선을 넘었다. 오전 11시까지 휴전선을 넘은 어선은 무려 200여 척이었다. 휴전선 부근에는 해군 함정 4척이 경비 중이었다. 해안을 담당한 56함은 휴전선을 넘어 수원단(북고성) 앞쪽까지 올라가는 50여 척의 어선들을 저지시키고 있었다. 잠시 후 북한 함정 2척이 나와 우리 어선들에 접근하고 있었다. 56함이 이를 저지하려고 이동 중에 북한의 육상포대에서 포격이 시작되었고, 56함은 남으로 피신하는 과정에 침몰하였다.”(조선일보,1967.1.21.)

언론 보도에 따르면, 56함이 침몰된 지점은 “북위 38도 39분 45초 동경 128도 26분 47초로 군사분계선 북쪽 4마일이라고 발표했다.”(조선일보,1967.1.20.) 또한 제239차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유엔 측 대표는 “56함이 군사분계선에서 북상했음은 시인했으나, 그것은 북한 측 함정이 어선을 납치하려고 기도했기 때문에 부득이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동아일보,1967.1.24.) 분사분계선은 넘은 명태잡이 어선들의 납북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다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어민들은 자신들의 월선조업으로 인해 무고하게 장병들만 희생되었다며 한동안 조기를 달고 조업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어선들의 전방작업은 다소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해군장병들의 무고한 희생을 기리는 <당포함전몰장병충혼탑(1970)>이 거진리 산29-1에 세워졌다.

한편, 명태잡이로 인한 납북문제는 정부의 입장에서도 실효적인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명태잡이 어부들의 자율적인 통제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시 어부들은 명태를 잡지 않으면 절량의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정부가 강경책을 쓴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북한과 외교적인 대화를 시행할 만한 남북관계의 긴장완화도 기대할 수 없었다, 정부는 날로 극심해지는 북한의 어선납치의 도발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서 어로저지선의 통제정책에 매달리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정책적 고려에서 발표한 것이 ‘어로저지선의 5마일 남하’(1968년 11월 23일) 결정이었다. 이것은 종전의 38도 35분 45초였던 어로저지선을 38도 30분(대진 등대 지점)으로 남하한 결정으로 등대 이북에 위치한 마차진리 어민들의 어로활동을 폐쇄시킨 조치였다. 이로써 소형어선들로 미역, 꽁치, 문어, 전복, 성게 등 갓바리(연안 어로행위)를 하던 마차진리 어민들은 토성면 사진리(1973년 7월 1일자로 속초시 장사동으로 편입됨)로 집단 강제 이주를 당했던 것이다. 전체 이주민은 164세대 800여 명이었다. 정부는 정착지원금으로 3세대 당 1척씩 50척의 동력선 건조를 지원하였다. 또한 가옥 82채를 건축하여 입주금 일부를 융자 지원하였다. 사진리 이주민의 일부 세대는 정착에 실패하고 마차진 마을로 귀향하기도 하였다. 또한 어로저지선 남하 결정은 명태 어획고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져 어민들의 시름은 더 깊을 수밖에 없었다. 명태잡이 어선들의 납북문제로 빚어진 정부 정책이 최북단 어촌마을 하나를 없앴다는 것은 지역의 큰 상흔으로 역사에 붉게 남아 있다.

이처럼 동해안에서의 명태잡이는 단순히 명태라는 이로운 바다고기를 잡는 기술이거나 그것의 생산과 유통 및 소비를 말하는 풍경이 전부는 아니다. 명태잡이의 풍경 속에는 어부들의 상처가 깊게 물들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납북어부, 해군장병들의 희생, 마차진 주민의 강제 이주 등은 고성의 역사에서 명태잡이와 관련된 기념비적인 상처들이다.

4. 납북어부의 현황

[표1] 연도별 해상납북 및 송환통계(척/명)

ⓒ 강원고성신문


*상기 납북선박 및 납북어부 중 5척이 침몰하고 16명이 사망함

[표2] 납북귀환어부 현황표

ⓒ 강원고성신문


[표1]은 1987.4.29. 열린 국무조정실 남북전력기획단 회의 문건에 첨부된 내용이다.
[표2]는 치안본부가 작성한 내용이다.

<고성군 납북귀환어부 현황>

_1954~1987년까지 동해안에서 납북어선 피랍사건이 다수 발생
특히 1966~1968년 고성 앞바다 접경지역에서 명태잡이 어선들이 다수 납북되었고, 고성지역 어민들의 피해가 가장 컸음
_미귀환 납북어부 : 고성 52명(동해안에서 가장 많음)
_재판 회부된 납북귀환어부 : 고성 313명
1차 진실화해위원회가 국가기록원 보존된 반공법 및 수산업법 위반자 판결문 입수자료 1,028명 중 전국에서 고성지역이 가장 많음(고성 313명, 속초 218명, 양양 9명, 강릉 78명, 동해 61명, 삼척 1명)
_고성지역에서도 대진, 거진, 아야진 등에 피해자가 집중(각 어촌마을마다 최소 10명 이상 발생)

*이상 내용은 엄경선(납북피해자지원센터장)이 작성한 자료와 고성군청에서 재구성한 자료를 참고하였다.

납북어부 관련 통계에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1960년대에 납북 피해가 가장 심했다는 것과 납북어부 중 미귀환어부가 평균 11%나 된다는 점이다. 특히 1970년대 초까지 동해상에서 발생한 납북사건은 주로 명태잡이 어부들을 대상으로 한 사건이었다. 이후 70년대 중반부터는 주로 오징어잡이 배들을 대상으로 납북사건이 발생하는 추세가 되었다. 필자의 고향마을에서도 10명의 납북귀환어부가 있으며 한 어부가 돌아오지 못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오징어잡이 배에는 나이 어린 10대 청소년들이 한철 ‘가고쟁이’(임시 선원)로 승선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납북어부 중에는 10대 청소년들도 다수 존재한다. 납북어부 문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너무나 많다. 이것은 가족의 상처만이 아니라 국가적인 과제이고 역사의 문제다. 특히 고성은 그 피해가 가장 큰 지역이란 점도 깊이 새겨야 한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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