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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진 1리부터 자산리까지 ‘명태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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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의 미래, 명태에게 길을 묻다<1> 명태산업 전성기의 추억과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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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5월 30일(월) 14:06 5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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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80년대 거진항 명태잡이 | ⓒ 강원고성신문 | | 고성군은 한때 우리나라 최대의 명태 산지였다. 그러나 이제 명태는 더 이상 잡히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잡히긴 잡히지만 통계를 내기 힘들 정도로 아주 조금만 잡힌다. 명태가 많이 잡힐 때 고성군의 인구는 6만5천명을 넘어 7만명을 육박했지만, 명태가 잡히지 않으면서 인구가 줄어 이제는 겨우 3만명을 오르내리고 있다. 고성 앞바다에서 산란하지 않는 명태처럼 고성지역의 신생아 탄생이 줄고 있다. 고성 앞바다로 돌아오지 않는 명태처럼 고향을 떠난 주민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금강산 육로관광 중단으로 지역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명태에 있다. 마을에 교량을 설치하는 것도 중요하고 문화시설을 건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명태다. 다행이 고성군이 지난해부터 ‘고성태’ 브랜드를 통해 옛 명태고장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단 방향은 잘 잡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사업은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회의적인 반응도 나온다.
‘고성군의 미래, 명태에게 길을 묻다’란 제목으로 명태산업 전성기의 추억과 반성, ‘고성태’ 브랜드화로 명태의 고장 명성 되찾기, 명태산업 부활 가능성과 앞으로의 과제 등에 대해 3회 연재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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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70년대 거진지역 명태덕장 아래서 관태하는 모습. | ⓒ 강원고성신문 | |
개도 물고 다닌다던 명태
고성지역은 1970~80년대만 해도 명태가 풍어를 이뤘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매년 겨울철이 되면 거진읍내 전체가 ‘명태밭’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지나가던 개도 명태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거진에 공지(공터)가 있으면 전부 덕장을 매서 명태를 걸었다고 보면 돼. 11월부터 3월까지 거진1리부터 자산리까지 명태덕장이 죽 늘어섰지.”
고성지역 명태 건조업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노재호씨(77세)는 이렇게 회상했다.
실제로 명태잡이가 한창이던 1980년 고성지역에서 잡힌 명태 어획량은 1만571톤(고성군수협 통계자료, 이하 어획량 같은 자료)이었다. 81년에는 1만7천527톤, 86년에는 1만9천327톤을 기록했다. 이처럼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고성에서는 매년 1만톤 이상의 명태가 잡혀 명실상부 우리나라 최대의 명태산지로 명성을 날렸다. 국내산 명태의 65%가 고성산이었다.
이때만 해도 거진을 비롯한 고성지역의 항포구는 명태잡이 어민들로 넘쳐났다. 명태의 주 어장은 거진항에서 연안 10마일 내외에 위치해 있었다. 뱃길로는 불과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지만, 어민들은 명태를 잡기 위해 새벽 3~4시경부터 출항에 나섰다. 연승과 유자망 등 명태를 잡는 조업 방법에 따라 출항 시기와 귀항 시기가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대부분 이른 새벽에 출항해 낮 12시 무렵이면 항포구로 돌아왔다.
거진 등 항포구마다 북새통
명태잡이 어선이 항포구로 돌아오는 시간이면 거진어판장 등 각 항포구는 명태를 하선하는 어민들과 그물에서 명태를 떼어내는 아낙들을 비롯해 명태를 거래하는 중매인과 이를 사려는 사람, 즉석에서 할복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북새통을 이뤘다.
사람들이 붐빈 것은 항포구만이 아니었다. 잡아들인 명태를 건조해 내다파는 건조업이 번성해 거진을 비롯한 고성지역 곳곳은 명태 덕장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넘쳐났다. 공터가 있으면 모두 덕장 부지로 사용했다. 거진 신도로 인근은 공터가 없어 모래사장 위에 덕장을 설치하기도 했다.
명태 할복에서부터 씻어 덕장에 걸기, 관태 만들기 등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됐다. 어촌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농한기를 맞은 농촌 주민들도 작업에 참여해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멀리 속초에서 돈 벌이를 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명태는 잡아들이는 방법에 따라 낚시태와 그물태(또는 망태)로 분류됐다. 당시 주민들에 다르면 낚시태는 가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생물로 거래됐으며, 그물태는 대부분 건조한 뒤 거래됐다고 한다.
낚시태는 모릿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아릿줄을 달고 아릿줄 마다 낚시 1개씩을 달아 수평으로 부설해 명태를 잡는 방법이다. 연승어업이라고 한다. 연승 어선들은 보통 3천여개의 낚시바늘이 달려있는 연승을 바다에 던져 명태를 잡아 올렸다.
명태 전성기에 거진을 비롯한 고성지역 곳곳에서는 연승어업 장비인 ‘낚시 함지’ 작업을 하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손가락 굵기 정도의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 낚시를 걸고, 소금에 절여 꼬들꼬들해진 양미리를 낚시에 끼우는 작업이다. 이것을 ‘낚시 찍는다’고 했다. 낚시태로 잡히는 명태는 최상품으로 인정받아 잡는 즉시 냉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국 각 지방으로 판매됐다. 이것을 ‘생태’라고 불렀다.
그물태는 긴 띠 모양의 그물을 어도에 부설해 명태가 그물코에 걸리도록 해서 잡는 방법이다. 유자망어업이라 한다. 명태를 많이 잡는 어부들은 오랜 경험의 축적으로 시기에 따라 어망을 설치해야 할 위치와 수심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건조 명태의 최고 명품 ‘북어’
명태 건조산업은 명태잡이→명태구입→할복→씻어서 덕장에 걸기→건조→관태→상차→위탁판매 등의 순으로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건조산업은 어민들이 잡아온 명태를 판장에서 중매인을 통해 구입한 뒤부터 시작됐다. 노재호씨의 경우 보통 할복팀 여자 30명, 씻어서 거는 팀 남자 10명, 북어를 싸리에 끼우는 관태팀 10명 등 50여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할복팀에게는 노임으로 창란을 주고, 씻어서 거는 팀에게는 한 두름에 얼마씩의 비용을 지불했다. 관태는 본인들이 싸리를 가져와서 작업했으며, 북어 600마리 1짝당 비용을 계산했다. 관태가 완성된 뒤에는 항운노조에서 묶어서 상차하는 작업을 하고, 서울 등지로 보냈다. 서울에 도착한 북어는 수수료를 주고 위탁판매를 시켰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건조과정이었다. 덕장에 걸린 명태는 시기에 따라 북어와 바람태로 불렸다. 12월 중순부터 2월 중순까지 덕장에 내걸어 말린 명태를 ‘북어’라 하고, 이를 전후한 시기인 11월~12월초와 2월말~3월 사이에 말린 명태를 ‘바람태’라고 했다. 맛과 품질은 얼리면서 말리는 ‘북어’를 최상품으로 쳤다. 육질이 부드럽기 때문이었다. 반면 바람태는 얼지 않은 상태에서 바람으로 말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맛은 북어에 비해 다소 떨어졌다.
덕장은 칸수로 규모를 따지는데 1칸은 사방 3m 넓이에 덕나무 10개가 들어가 10개 고랑이 생긴다. 이것이 2층이므로 총 20개 고랑이 생긴다. 1개 고랑에 80마리씩 걸었다. 100칸 규모의 덕장이면 고랑이 2천개가 되고, 각 고랑에 80마리씩 총 16만 마리를 건조할 수 있었다.
이처럼 명태 산업이 호황을 맞으면서 거진지역은 전국에서 명태잡이를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인구수가 점점 늘어나 2만5천명에 달했다. 1973년에는 거진면이 읍으로 승격됐다. 명태잡이 어민들과 건조인들의 수입이 늘고 씀씀이가 커지면서 거진읍내 시가지에는 이를 노리고 생겨난 술집과 다방 등도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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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80년대 명태 할복하는 모습. | ⓒ 강원고성신문 | |
87년 명태 어획량 1만톤 붕괴
명태산업의 활성화로 고성군은 역사상 최대의 번성기를 맞았지만, 이런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았다. 명태 어획량이 큰 폭으로 줄어든 1987년부터 서서히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1987년 고성지역 명태 어획량은 처음으로 1만톤이 붕괴된 6천911톤을 기록했다. 전년의 30% 수준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었기 때문에 어민들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다가올 명태산업 붕괴의 전조였다.
명태 어획량은 이듬해인 89년 8천383톤으로 다소 회복되는가 싶더니 90년 5천17톤, 98년 2천814톤, 99년 1천141톤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급기야 2000년에는 1천톤 이하로 줄었으며, 2004년부터는 100톤 이하로 줄었다.
명태 어획량 회복에 대한 한가닥 희망을 안고 2001년부터 어로한계선인 북위 38도33분과 북위 38도 35분 사이에 있는 북방어장에서 조업을 시작했으나, 어획량은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급기야 명태는 최근 들어 마릿수로 통계를 낼 지경에 이르렀다. 국립수산과학원 동해수산연구소는 지난 2009년부터 명태의 자원회복을 위해 ‘동해안의 살아 있는 명태를 구합니다’는 제목의 홍보물을 배포하는 등 연구용 명태구하기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금년 1월 한달 동안 잡아들인 명태는 총 56마리 88kg이었으며, 2월에는 60마리 98kg이 잡혔다.
반성 … 인제 황태의 경우
주민들은 이제 와서 명태가 왜 안 잡힐까 하고 연구하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흔히 명태 어획량 감소의 원인으로 명태 새끼인 노가리의 남획, 폐어망 방치, 부산지역 대형 트롤어선의 싹쓸이 조업, 지구온난화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보다 명태 회귀의 주요 길목인 러시아와 북한에서 명태조업이 활발한 게 더 큰 원인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명태가 안 잡힌다는 데 있는 게 아니다. 명태 어획량 감소와 함께 건조업 등 명태가공산업까지 사라져가고 있는 게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인근 인제지역의 경우 명태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지만, 지난해 ‘용대황태’란 이름으로 ‘지리적표시 단체표장’ 등록을 마쳐 전국 최고 브랜드로 우뚝 서게 됐다. 인제군은 농림수산식품부가 황태가 국내산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리적표시제 등록을 불허하자 다른 방법으로 노력해 마침내 국내 최고 품질을 인정받았다. 이에 대한 벤치마킹이 필요하다. 속초지역의 경우도 명태의 부산물인 명란과 창란 등을 가공해 만드는 명태가공산업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노재호씨에 따르면 거진에 덕장이 부족해 비용을 주고 건조만 시키던 곳이 진부령과 용대리였다. 그런데 용대리 황태는 이미 명태의 본고장인 고성의 명성을 앞지르고 있다. 명태가 잡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넋을 놓고 있을 동안 인제는 재빨리 자신들만의 브랜드를 정착시킨 것이다.
고성지역의 많은 주민들은 지금이라도 노력한다면 ‘명태의 고장’이라는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행정의 체계적이고 전폭적인 지원과 지역주민들의 ‘할 수 있다’는 마음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울러 행정 위주의 일방통행식 추진이 아니라 명태산업 번성기를 직접 체험한 지역 원로 등 ‘명태 전문가’들과 소통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최광호 기자
거진 명태덕장의 ‘살아있는 전설’ 노재호씨(77세)
한 해 500짝 이상 판매… ‘북어’가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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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노재호씨 | ⓒ 강원고성신문 | “옛날에 우리가 덕장을 할 때는 황태라는 용어가 없었고, 북어라고 했어. 인제사람들이 말리다보니 누렇게 돼서 황태라고 부른 것이지. 최고는 북어야.”
1960년대부터 거진읍 자산리에서 명태덕장을 운영해온 노재호씨는(77세, 사진) “북어는 한 겨울인 12월중순부터 2월중순까지 말린 명태를 말한다”며 “얼리면서 말리기 때문에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좋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날씨가 다소 따뜻한 11월~12월초와 2월말~3월초에 말리는 명태를 바람태라고 한다”며 “황태는 바람태의 일종이고, 북어보다는 질이 떨어지는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노씨는 명태가 한창 잡히던 시절 매년 11월부터 3월까지 거진지역에서 명태덕장을 안 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실제로 덕장을 안했더라도 할복 등 다른 방식으로 명태 건조산업에 관여했다고 덧붙였다.
노씨에 따르면 당시 거진 주민들의 분포는 1리부터 5리까지는 어민, 6리부터 8리까지는 명태를 사서 건조해 파는 상인, 9리부터 11리까지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주민들이었다.
그는 자산리에서 200칸 규모의 덕장을 운영했다. 이곳에서 매년 약 32만 마리의 명태를 건조한 뒤, 관태 상태로 서울로 올려보내 위탁방식으로 판매했다. 1짝에 600마리씩 한 해에 500짝 이상을 팔았다. 한번에 다 판 것이 아니라 할복에서 관태까지 완료된 것을 2~3회에 나눠서 판매했다.
노씨처럼 대규모가 아니라 소규모로 건조하는 주민들도 보통 10짝 정도는 건조했으며, 이들은 판매하지 않고 집에서 먹거나 친척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10여년전부터 북어를 가공해 제수용 포로 만들어 파는 일을 하고 있는 그는 고성군이 추진하고 있는 ‘고성태’ 브랜드화 사업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하라면, 치수가 너무 작아 상품가치가 없다고 본다”고 했다. 또 “북어는 얼려서 말려야 육질이 부드럽고 좋은데, 요즘은 기후가 60~70년대보다 높아 좋은 상품이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노씨는 그러나 “사실 75년 후반부터 부산 트롤어선들이 북태평양과 일본에서 잡아온 냉동 원양태가 거진으로 들어와 건조되기도 했다”며 러시아산이라도 상품 가치만 있으면 돈 벌이가 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최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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