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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東庫)와 객사 다시 짓고, 허물어진 청사 헐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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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의 고성이야기 <58> 역사와 명소를 찾아서④ 고성지역의 금석문Ⅵ 간성 와우산(臥牛山)에 위치한 선정비들의 내력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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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9월 18일(화) 09:38 78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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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인정 영세불망비 | ⓒ 강원고성신문 | |
⑬ 군수 이인정 영세불망비(郡守李寅正 永世不忘碑)
〈비문 전면〉
군수이공인정영세불망비
(郡守李公寅正永世不忘碑)
해륙구송(海陸俱頌) 연품보영(捐稟補英)
서영중천(舒營重薦) 수급아전(遂及我田)
〈비문 후면〉
신미2월 일(辛未二月 日)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상1리 293-1(GPS : N38˚22´39.8˝ E128˚28´06.3˝)
[연 대] 1871년(고종 8), 2월
[크 기] 비신 높이 120㎝, 너비 46㎝, 두께 22㎝
대좌 가로 72㎝, 세로 44㎝, 높이 10㎝
[내 용] 군수 이인정(李寅正, 1799∼1876)은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本貫)는 전주(全州)이며, 자(字)는 공직(公直)이다. 효령대군의 15대손이며 참봉(參奉) 필연(泌淵)의 아들이고 참판(參判) 인량(寅亮)의 동생이다. 사마시(司馬試)에 급제(及第)해 군수(郡守)·복정(卜定)·공조(工曹)·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간성 군수로는 1866년(고종 3) 4월 17일에 와서 1870년 12월 과체(瓜遞)되었다. 1897년 작성된 『수성읍지』에 따르면, 많은 치적(治積)남겼는데 그 가운데 특히 ‘동고(東庫)’를 고쳐지었고, 1869년(고종 6) 여제단(여祭壇, 신주 모신 곳) 1칸, 제물서(祭物所) 1칸, 제관방(祭官房, 제사를 맡아보는 관리의 방) 1칸을 지었다. 1870년(고종 7) 객사(客舍)을 다시 짓고 담장과 더불어 동쪽 대청 앞으로 작은 문을 내고 허물어진 청사를 헐어내는 등의 4년간 많은 공적을 남겼다.(丙寅郡守李寅正改建東庫, 여祭壇奉安屋子一間 祭物所一間 祭官房一間 同治己巳郡守李寅正重修, 庚午郡守李寅正改建而墻壇與東大廳前小挾門又爲頹破).
이 비는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간성군편에 의하면 1871년(고종 8)에 간성군민이 안심리(安心里, 지금의 신안리) 처음 건립되었는데, 현재 와우산 중턱에 이 지역의 다른 선정불망비와 함께 있다. 비석은 개석(蓋石)이 없이 비신만 있는데, 화강암 계통의 암질이며, 비의 윗부분은 밋밋한 사선으로 처리한 원수형(圓首形)에 가깝다. 비좌는 네모난 방형의 시멘트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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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면익 영세불망비 | ⓒ 강원고성신문 | |
⑭ 군수 이면익 영세불망비(郡守李冕翼 永世不忘碑)
〈비문 전면〉
군수이공면익영세불망비
(郡守李公冕翼永世不忘碑)
〈비문 후면〉
기유3월 일(己酉三月 日)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상1리 293-1(GPS : N38˚22´39.8˝ E128˚28´06.3˝)
[연 대] 1909년(康熙 2), 3월
[크 기] 높이 111㎝, 너비 45㎝, 두께 21㎝
가로 72㎝, 세로 42㎝, 높이 10㎝,
[내 용] 군수 이면익(李冕翼, 1813~?)은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경간(景幹)이다. 음보(蔭補)로 벼슬을 시작해 간성군수를 역임했다.
1908년 1월에 간성군수로 부임하여 1911년 9월까지 역임을 하였다. 그의 행적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한 자료가 미미한 관계로 정확하게 어떠한 치적에 의하여 건립된 배경을 현재로는 확인 할길 없다. 다만 『건봉사급건봉사말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史蹟) 「지방관리공덕비」에 따르면, 건봉사 부도군에 비석의 현황을 기록해 놓고 있어 참고할 수 있는 점이다.
이 비석은 현재 와우산 중턱에 이 지역의 다른 선정불망비와 함께 있다. 비석은 관석(冠石)과 비신(碑身)이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져 있는데, 관석에는 연꽃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화강암 계통의 암질이며, 비의 윗부분은 밋밋한 사선으로 처리한 원수형(圓首形)에 가깝다. 비좌는 네모난 방형의 시멘트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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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정재용 영세불망비 | ⓒ 강원고성신문 | |
⑮ 군수 정재용 영세불망비(郡守鄭在容 永世不忘碑)
〈비문 전면〉
군수정공재용영세불망비
(郡守鄭公在容永世不忘碑)
애민지혜(愛民之惠) 여차공덕(如此功德)
급우산문(及于山門) 하불입석(何不立石)
〈비문 후면〉
정미12월 일세우다(丁未十二月 日立)
[소재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상1리 293-1(GPS : N38˚22´39.8˝ E128˚28´06.3˝)
[연 대] 1847년(헌종 13)
[크 기] 비신 높이 96㎝, 너비 42㎝, 두께 20㎝
대좌 가로 96.5㎝, 세로 57㎝, 높이 18㎝
[내 용] 군수 정재용(鄭在容, 1793 ~?)은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本貫)은 동래(東萊)이며, 자(字) 사형(士龍), 현감(縣監) 동안(東晏)의 아들이다. 1810년(순조 10)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합격한 뒤 음관(蔭官)으로 1857년(철종 8) 6월에 함평현감 1858(철종 9) 12월 김해부사(金海府使) 등을 역임하고 목사(牧使)을 지냈다.
1842년(헌종 8)8월에 간성군수로 부임하여 1847년 6월 군자판관(軍資判官)에 제수되었다. 재직하는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1842년에는 청간관(淸澗館)을 다시 고쳤으며(淸澗館, 道光壬寅郡守鄭在容改建), 1846년(헌종 12) 4월 11일 금강산건봉사 북쪽에 있는 요사채가 불에 타자 상부에 서면(書面)으로 보고하자 강원도관찰사 박종길은 임금님께 아뢰어 공명첩(空名帖) 300장을 내려 주는 은총을 받기도 하였다. 1847년에 공사를 마치면서 비가 건봉사에서 건립되었다.
현재 와우산 중턱에 이 지역의 다른 선정불망비와 함께 있다. 비석은 개석(蓋石)이 없이 비신만 있는데, 화강암 계통의 암질이며, 비의 윗부분은 둥글게 처리한 월두형(月頭形)이고. 비좌는 네모난 방형의 시멘트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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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광섭 칼럼위원(향토사학자) | ⓒ 강원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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