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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 출사길 열어주고, 정착하게 일자리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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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의 고성이야기 <67> 간성군 수령의 삶과 업적② 택당 이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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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5월 13일(화) 09:14 121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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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경기도 여주에 있는 기천서원(沂川書院). 이곳은 조선 중종∼효종 대의 명현인 택당 이식을 비롯한 학자들을 모시고 있다. | ⓒ 강원고성신문 | |
4. 간성현감 택당 이식(李植)의 업적
택당 이식(李植)의 업적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승려를 모집하여 진부령(陳富嶺)의 폐로(廢路)를 복구한 것과 41쪽에 달하는 수성지(水城志)를 편찬한 것, 그리고 임기를 마치고 출사 후에도 간성고을의 폐단인 4절목을 조정에 상소하여 해결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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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택당이식이 진부령 개통을 위해 기금을 모집하기 위해 쓴 모연문(募緣文). | ⓒ 강원고성신문 | |
① 진부원(陳富院)의 서쪽 고갯길을 닦기 위해 기금을 모집한 글 임신년(1632년)
옛날에 전주(田疇)가 노룡(盧龍)의 길을 개척했던 그 의도는 오로지 정벌(征伐)하기 위한 것이었고, 강락(康樂)이 임해(臨海)의 산을 통행했던 그 일은 전적으로 유람(遊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적은 지금도 이야기의 소재가 되고 있고, 그 풍류는 아직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 관동(關東) 지방으로 말하면 삼한(三韓)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독차지하고 있고, 또 수성(水城, 간성(杆城)의 옛 이름)으로 말하면 아홉 고을 가운데 비옥한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라 선박이 이곳에 집결하고 저잣거리에 각종 물자가 실려 오는 만큼, 크게는 경성(京城)에 공물(貢物)을 바치는 일을 수행하고 작게는 제로(諸路)의 상인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것은 산이 겹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겨우 잔도(棧道)를 통해 그 길이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벼랑길을 따라가노라면 마치 물고기를 한 줄로 꿰듯 한 사람씩 지나갔던 음평(陰平)의 길을 떠올리게 되고, 남의 정수리를 밟고 발을 받쳐 들면서 올라가노라면 겨우 말을 분간했던 태악(泰岳)의 봉우리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렇듯 깊이 웅덩이가 패인 채 계곡이 이리저리 돌아 나가는 가운데, 그중에서도 특히 설악(雪岳)의 봉우리가 가장 높고 험준한 모습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데, 이 때문에 수레가 부서지고 말이 넘어지는 일이 계속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여름에 장마가 지거나 겨울에 얼음이 얼기라도 하면 이곳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발자취가 점점 끊어지기 때문에, 공물을 바치는 일도 많이 거르게 되고 생활에 필요한 물자도 유통되지 못하는 형편이다. 물론 충신이라면야 수레를 되돌린 효자와는 반대로 곧장 말을 몰아 나갈 수도 있겠지만, 시인이라면 산을 아예 깎아 버리면좋겠다고 부질없이 생각하면서 말없이 탄식할 수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생각컨대, 이 서쪽 고개는 두 개의 높은 산 사이에 놓여 있고 읍성(邑城)에서도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데, 본래 단단한 암석으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흙을 쉽게 파내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지세(地勢)가 너무 가파르기 때문에 소에게 황금 똥[便金]을 누게 할 공간이 없는 점은 있다 하겠지만, 수풀이 울창하게 우거진 가운데 뱀이 뒤로 물러날 것[退蛇] 같은 언덕이 앞에 높다랗게 서 있을 따름이라고 하겠다.
이는 실로 고을 수령이 자신의 직분상 마땅히 걱정해야 할 일이기는 하였지만, 어찌 또 산인(山人 승려)과 단월(檀越 불교 신도)의 도움이 없었다고 하겠는가. 승려 모등(某等)이 자비(慈悲)의 서원(誓願)을 세워 우수의 뜻을 결행(決行)하면서, 기금을 널리 모집하여 촉정(蜀丁)의 힘을 발휘하려 하였으므로, 이제 바야흐로 교통의 요지인 이곳에 길을 뚫어 험난하기 그지없는 이곳의 위험을 길이 제거해 보려고 한다.
아, 도(道)에는 방편(方便)이 있으니 유가(儒家)와 불가(佛家)의 학술이 다르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인(仁)에는 분별이 없으니 승려와 속인 역시 본래 서로들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곳에다 길을 닦고 다리를 놓아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선정(先正)께서도 일찍이 인정하셨던 바요, 여기에다 사찰을 건립하고 탑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고승(高僧)도 말을 했었던 바이다.
따라서 이제 실제로 천 길의 험준한 산을 개척하여 만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길을 뚫어 놓는다면, 구태여 외도(外塗)의 미혹된 사람들을 구제하거나 대각(大覺)의 바른길을 열어 놓을 필요도 없이, 그 일이 천고(千古)에 환히 드러나고 그 덕이 중생(衆生)에게 두루 미치게 될 것이니, 이 어찌 인연(因緣)을 광대하게 하고 동시에 세계를 쾌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바라건대, 중외(中外)의 사서(士庶)와 사방의 빈려(賓旅)들은 각자 이 공사에 조력(助力)하여 자신의 역량을 아끼지 말았으면 한다. 그리하여 혹 곳간에서 덜어 내어 양식을 돕기도 하고 혹 삼태기와 삽을 들고 직접 현장에 뛰어들기도 하는 등, 자신의 힘의 강약(强弱)에 맞추고 재력(財力)의 빈부(貧富)에 걸맞게 하여,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 이루어 내는 공[不日之功]을 다 함께 성취하는 동시에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 것인지 알 수 있도록[知風之自]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늘 바로 그에 따른 상벌(賞罰)이 당연히 행해질 것이니, 어찌 선악(善惡)에 따른 과보(果報)를 내생(來生)까지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이제 이 종이 끝에다 각자 성명을 기재하여 앞으로 참고할 자료를 삼을 수 있게 해 주면 좋겠다.
참고문헌『택당 별집 제12권 모연문(募緣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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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곡 장유가 택당 이식이 집대성한 ‘수성지’의 서문으로 쓴 글. | ⓒ 강원고성신문 | |
②《수성지》 서문[水城志序]
군읍(郡邑)에 지(志)가 있는 것은 국가에 사(史)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국가의 사관(史官)으로 말하면 늘 그 일만을 수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다 기록을 하지 못하는 폐단이 많이들 발생하고 있는데, 더구나 전적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을 가진 수령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니 수령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하는 여가에 문헌(文獻)에다 힘을 쏟는다는 것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동방은 주군(州郡)이 삼백이요 명도(名都)와 웅진(雄鎭)들이 그 사이에 뒤섞여 서로들 바라다보이고 있는데, 지(志)를 가지고 있는 곳은 열 손가락에도 차지 못하는 형편이다. 이것이 비록 작은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또한 문명(文明)한 시대에 있어 흠이 되는 하나의 일이라고 하겠다.
내 친구인 덕수(德水) 이여고(李汝固 이식(李植))가 지난해 어버이를 봉양할 목적으로 외직(外職)을 청하여 간성 현감(杆城縣監)으로 나갔다가 임기도 다 채우지 못한 채 옥당(玉堂)의 장관으로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 그런데 재임한 기간이라야 1년을 갓 넘긴 상태에서 그야말로 그 고을의 전고(典故)를 총망라하여 《수성지(水城志)》 한 권을 지어 내었다.
간성으로 말하면, 영동(嶺東) 지방의 소군(小郡)이요 또 현(縣)으로 칭호가 강등된 곳으로서 거리도 먼 데다 벽지(僻地)에 위치하고 있으니, 대개 누추한 고을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지금 여고(汝固) 덕택에 멋지게 치장되어 성명(聲名)과 문물(文物)이 장차 사방에 유포(流布)될 수 있게 되었으니, 한 지역이 한 사람에 의해 드러난다고 하는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일과 관련하여 또 느껴지는 점이 있다. 지난 기사년(1629, 인조 7)에 내가 나주(羅州)로 좌천되었었는데, 나주는 정말 큰 고을이었다. 내가 비록 재주가 없어 태학사(太學士 홍문관 대제학)를 그만두고 나가게는 되었다 하더라도 저술하는 일만큼은 나의 소임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진작부터 주지(州志)를 만들어 볼 생각은 갖고 있었으면서도 끝내 병 치다꺼리를 하느라 그 일을 하지 못하였다.
아, 나주는 큰 고을인데도 나 때문에 빛이 나지 못하였고, 간성은 누추한 고을인데도 여고 덕분에 영광을 얻게 되었는데, 이것을 어찌 당시의 어쩔 수 없는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이 일만을 두고 보더라도 여고의 근면하고 민첩한 점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알겠다. 그리하여 이렇게 써서 나의 부끄러움을 표하는 바이다.
참고문헌『계곡집 제7권 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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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택당 이식이 간성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한 내용이 담긴 인조실록. | ⓒ 강원고성신문 | |
③ 인조실록(仁祖實錄 28卷)
인조(仁祖) 11년(1633,숭정 6) 3월20일에 1번째 기사에 따르면 ‘부제학 이식이 간성에 부임했을 때 목격한 폐단을 진술하다’는 내용이 있다.
부제학 이식(李植)이 일찍이 간성(杆城)에 부임하였을 때 목격한 것을 상소하여 그 폐단을 진술하였는데, 그 첫째는 태강 실신(汰講失信), 둘째는 전결 자각, 셋째는 역전 급복(驛田給復), 넷째는 여정 도산(餘丁逃散)이었다. 상이 이에 답하였다.
“상소를 읽고 잘 알았다. 조목별로 아뢴 폐막은 해조로 하여금 헤아려 조처하게 하겠다.”
위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첫째 태강실신이다. 백성들이 아무리 학문이 있고 글을 잘하여도 조정에서 알아 주지 않아서 출사를 할 수 없던 것을 길을 열어 주었으며, 둘째 전결자각이라 하여 군민이 농사를 지으려 하나 땅이 부족하므로 개간사업을 하여 토지를 보급하여 줌으로서 자급자족을 하도록 하였으며, 셋째로 역졸급전이라 하여 역졸들에게 땅과 일자리를 주어 생활기반을 잡아 안정된 생활을 하도록 하였으며, 넷째로 여정도산이라 하여 일하기 싫은 사람들이 도처에서 모여든 이들에게 도망을 다니지 못하도록 일자리를 주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김 광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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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광섭 칼럼위원(향토사학자) | ⓒ 강원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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