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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성읍성 석성 295보, 토성 86보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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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의 고성이야기 <83> 조선시대 간성의 읍치경관 연구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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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5일(수) 11:08 158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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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곽(城郭)
3) 문헌적 검토
(1) 서지류(書志類)
간성읍성에 대한 관찬·사찬지리지에서 쓰인 기록들의 바탕으로 문헌을 검토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지리지』「153卷」, 1454. 읍성. 석성의 둘레가 295보(536.3m)이며, 토성은 86보(156.3m)이다.(周回石城二百九十五步,土城八十六步) ▲『신증동국여지승람』「45卷」, 1530. 성곽. 읍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565척(777.2m)이고, 높이가 13척(3.9m)이다. 안에는 우물 한 곳이 있다.(邑城石築周二千五百六十五尺高十三尺內有一井)
▲『수성지』1633. 성곽. 읍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40보(436.3m)이고, 높이가 15척(4.5m)이다. 1591년에 증축하였고, 동서문 안에는 우물 두 곳이 있다. ○승람에서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면, 읍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565척(777.2m)이고, 높이가 13척(3.9m)으로, 지금은 여장이 없다.(邑城石築周二百四十步高十五尺萬曆辛卯所重築有東西二間內有二井○按勝覽載邑城周二千五百六十五尺高十三尺而今無其장)
▲『동국여지지』「7卷」, 1656. 성곽. 군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565척(777.2m)이고, 성문城門이 있으며 안에는 우물 한 곳이 있다. (郡城石築周二千五百六十五尺有門城內有一井) ▲『여지도서』「17 卷」, 1760. 성지. 읍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565척(777.2m)이고, 높이가 15척(4.5m)이다. 지금은 훼손되어 헐어져버렸다. 성안에는 우물이 두 곳과 연못 네 곳이 있으며 두 곳에는 연꽃을 심어 길렀다. 두 곳은 폐해졌다.(邑城石築周二千五百六十五尺今廢毁城內有二井有池四二植蓮培養二則廢)
▲『여도비지』「15 卷」, 1853~1856. 성지. 읍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565척(777.2m)이고,높이가 13척(3.9m)이다. 우물이 두 곳과 연못 네 곳이 있다. ○고려 덕종(德宗) 2년(1033)에 간성현(杆城縣)에 성을 쌓았다.(邑城石築周二千五百六十五尺高十三尺井二池四○高麗德宗二年城杆城縣者是) ▲『대동지지』「16卷」, 1861~1866. 성지. 읍성은 둘레가 2,565척(777.2m)이다. 우물이 두 곳과 연못 네 곳이 있다.(邑城周二千五百六十五尺井二池四) ▲『수성읍지』 1897. 성지. 읍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40보(436.3m)이고, 높이는 15척(4.5m)이다. 1591년(辛卯)에 증축하였고, 동서문東西門 안에 우물 세 곳과 연못 네 곳이 있다.(邑城石築周回二百四十步高十五尺萬曆辛卯所重築而有東西門內有三井四池).
이상 살펴본 결과 특징적인 차이점을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돌과 흙으로 읍성을 축성했다는 것이다. 둘째, 읍성 안에 우물하나 있었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4백년이 지난 1897년 작성한 『수성읍지』에서는 세 개의 우물과 네 곳의 연못의 변천과정을 알 수가 있다.
셋째, 간성읍성의 연혁에 대하여 『문종실록』에 보면 1451년(문종 1) 강원도 내 각 고을에 읍성을 수축한 기사를 확인 할 수 있다. 이때 간성 읍성 둘레 2,709척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후로 『수성지』에서 1591년 읍성을 증축했다는 내용과 『대동지지』16권 城池조에는 1033년(덕종 2)에 축성한 것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참고로 간성읍성의 축성시기는 경기도 안성의 망미산성 주변 토기와 간성읍성 주변 토기가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로 미뤄볼 대 고려시대인 995년(고려 성종 14년) 전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로 각 지리지에서 표현된 둘레와 높이가 차이가 있지만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간성읍성이 조선 초기 보다는 후기로 갈수록 점점 퇴색되는 것을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17권 城池조에서 “지금은 훼손되어 헐어져 버렸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당시 간성읍성은 군사적인 기능을 상실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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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해동지도. | ⓒ 강원고성신문 | | (2) 지도류(地圖類)
읍성의 성곽이 확인 가능한 고지도 자료는 「해동지도」, 「여지도」, 「지승」, 「1872년 지방지도」 등 18세기 이후 즉, 조선후기에 제작된 지도들이다. 당시 지도제작은 여장의 표현, 출입성문의 형식 등 간단한 성곽표현과 성내 주요 시설인 객사와 동헌을 표현하는 정도이며, 일부 지도에서는 성외부의 향교를 함께 표기 하고 있으나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지는 않다.
①「해동지도(海東地圖)」(간성군)= 1750년대 제작된 것으로 가로×세로(47.0×30.5㎝)으로 규장각에 소장(古大4709-41)되어 있다. 간성 읍성의 형태로 그렸으며 그 안에 객사, 창, 아사 등의 관청과 영월루, 연정 등의 정자를 그렸다. 향교는 읍성의 서쪽 지금의 간성읍 교동리에 있었다.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이 막혀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 접해 있다. 지도에서 길 표시를 간략하게 일직선의 형태로 표시하면서 험준함을 나타나기 위하여 산들을 중첩하여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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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여지도. | ⓒ 강원고성신문 | | ②「여지도(輿地圖)」(간성군)= 1789년대 제작된 것으로 가로×세로(36.8×28.6㎝)으로 규장각 소장(古4790-58)되어 있다. 해동지도의 지도 표현 양식은 다르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비슷하다.
③「지승(地乘)」(간성군)= 1800년대 제작된 것으로 가로×세로(27.0×19.0㎝)으로 규장각에 소장(奎15423)되어 있다. 지도의 중앙 우측에 성곽(둘레 240보)과 함께 객사, 아사, 연정, 영월루 중심으로 읍치를 배치하였다. 지금의 하리 일대이다. 동문의 문루가 무너졌는지 그림 상에 묘사되지 않고 있다. 여타의 지도와 달리 읍성 안에 도로망이 그려져 있다
④「1872년 지방지도」(간성군)= 1872년대 제작된 것으로 가로×세로(35.1×25.3㎝)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고을의 외곽에 산을 둥그렇게 그려 인접지역과 분리하였고 읍치는 환포형으로 그려 중심공간임을 강조하였다. 읍치의 동쪽에는 북천과 남천 수구水口가 그려져 있는데 풍수적 사고가 지도에 반영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읍치에는 돌로 축조된 성곽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 많이 훼손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관청 건물을 그리지 않고 단지 글자로 표시하였다.
지명을 원이나 직사각형 내부에 기입하였으며 성 내부에는 동남쪽과 동북쪽 지역에 세 곳의 우물의 위치와 네 곳의 연못의 함께 상세히 그려져 있어 여타의 지도와 차이점이 보인다. 반면에 읍내와 더불어 장시가 개설되어 상업 활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정 영월루와 연정은 그려놓지 못한 것으로 보아 이 당시에 무너져 버린 것으로 보여진다.
읍성은 조선시대 지방행정도시로서 기반 시설을 갖춘 지역의 중심지였으나 일제강점기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읍성과 관아는 철저하게 훼손되어졌다. 강원도지역에 조선후기 읍치소(군, 현, 부, 목, 군영포함)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나 이 시기 대부분이 면소재지 이하의 마을로 쇠락되었다. 이러한 쇠락의 과정에서 읍치소의 관아시설물들과 읍성 등 여러 시설들이 훼손 또는 멸실되었으며, 현재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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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광섭 칼럼위원(향토사학자) | ⓒ 강원고성신문 |
김 광 섭
- 향토사학자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위원
- 고성향토문화연구회 사무국장
- 논문 : 〈선유담의 고찰〉, <간성
의 만경대와 누정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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