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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치의 핵심적 권력 장소 객사·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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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의 고성이야기 <84> 조선시대 간성의 읍치경관 연구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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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11일(금) 14:45 159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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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후기 광여도. | ⓒ 강원고성신문 | | Ⅳ. 간성읍치의 공공시설물
1. 중심시설
조선후기 간성군 지도에는 전체면적에 비해 읍성부분이 매우 작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읍성의 중심에는 건물들이 대체로 그려져 있는데, 바로 읍성의 중심시설이며 다르게 표현하면 읍치의 권력기구들이 집중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읍성 중심부에 입지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적·행정적 시설은 조선시대 읍치의 핵심적 권력 장소인 객사·동헌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권력 장소는 주로 북방에 위치하는 진산의 맥을 따라 중요한 통치 시설이 순차적으로 배치되는 방식으로 중심을 구성한다. 객사, 관아, 각각 중앙정부의 왕, 고을의 수령, 고을의 지배계급인 양반을 상징한다.
“읍성 안에는 각종 관청과 민가가 있었다. 건물 가운데 중심은 동헌과 객사였다. 이 외에 아사, 향청, 군사, 작청, 군관청, 사령청, 관노청, 누정 등의 부속건물이 존재하였다”라는 간성읍지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간성의 객사 위치는 현재 간성읍 상리 198번지 일대로 읍성의 중심에서 북서쪽으로 치우쳐져 있고, 동헌은 읍성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객사는 그 면적이 넓었던 만큼 고성교육지원청을 비롯하여 고성군청, 상가, 주택지가 혼재해 있다. 고성경찰서가 1997년대 옮겨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나란히 위치해 있었다.
객사 동루는 영월루(詠月樓)라 하는데, 추정위치는 하리 120번지이다. 봄과 가을 달(月)을 감상하기에 적당했는지 이름 하여 ‘영월루’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백성에게는 객사를 한층 더 품위 있게 느끼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고, 양반 지배계급에게는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문화 장소로서 역할 했던 것 같다.
동헌은 그 이름만으로 해석하자면 ‘동쪽에 있는 건물’이란 의미이지만, 군·현의 수령이 공무를 집행하는 장소로서 오늘날의 시·군청사의 주요 건물에 해당한다. 간성의 별호를 따서 ‘水城館’이라고도 불리는 동헌의 위치는 행정구역상 고성군 간성읍 하리 28번지이다. 1914년 동헌 터에 군 청사를 건축하고, 1954년 수복 이후 신축준공하기 전까지 간성행정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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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56년 간성면 사무소 직원들 단체 사진. | ⓒ 강원고성신문 | |
1) 객사(客舍)= 고려시대부터 지방 읍치 내에 관아와 함께 한 고을을 구성하는 주된 관청건물 중의 하나로 기능적·상징적 중심의 역할을 수행하던 건물을 뜻한다. 고을 읍성을 중심으로 관아건물을 신축할 때에 가장 중심이며 전망이 좋고, 앞에 대로(大路)를 둔 위치에 집중 건설되었다. 대부분 객관을 중심으로 좌우에 행정상 필요한 관아건물이 배치되어 지방행정의 중심이었다. 건물도 다른 관아건물보다 웅장하게 가운데 정청과 좌우 동 ·서헌을 붙이어 건축되었고, 대청과 온돌방을 갖춘 구조로 만들었다.
조선전기 330개 고을에 1~2개소가 설치되었으며, 주방과 곳간, 욕실, 정자나 누각, 잘 가꾸어진 정원, 연회를 베풀 수 있는 정방형의 석대 등이 부속공간으로 마련되었다. 행정관청의 필수적인 시설인 만큼 행정단위마다 건립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과정을 거치는 동안 대부분의 객사가 변형되거나 철거됨으로써 그 건축적 유형을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간의 장소 및 주변 경관형식과 내용의 역사성마저도 단절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객사의 규모와 관련하여 1757년~1765년까지의 『여지도서』에 의하면 간성군의 공해조(公해條)에 객사가 60칸으로 되어 있다.(客舍 六十間) 광무연간 1904년 『간성군가사안』에서는 郡內面 中里에 위치하고 있으며, 기와건물 형태로 12칸으로 되어 있다.
1897년 군수 권세규(權世圭)의 『수성군읍지』부록 「간성군지도」에서 여타의 지도와 비교하여 위치상 서북쪽 방향에 자리하고 있는 점은 동일하나 건물의 규모나 형식에 있어 차이점이 보인다. 객사의 건축 구조상 중앙에 직사각형 평면의 맞배집으로 주관을 삼고 좌우의 지붕을 한 단 낮춰 지붕 끝은 팔작지붕으로 된 양 익사가 대칭으로 이루어졌다. 이 위치에는 1910년 간성 공립보통학교 교무실로 사용했다가 1964. 1. 1 교육자치제 실시로 고성교육지원청이 자리하고 있다.
2)아사(衙舍)= 일반적으로 관원이 모여 나랏일을 돌볼 수 있는 건축물을 이야기 한다. 즉 지방관이 공무를 주재하는 곳으로 지방관청의 주축이라 할 수 있다.
간성군의 관아는 고을 수령이 업무를 집행하는 공간으로 『수성지』에 의하면 본래는 객사의 오른쪽에 있었다가 읍성내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던 관아(아사)가 남서쪽에 옮김으로서 그 중요성이 객사와 같은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간성의 관아를 살펴보면 고을 안 최고 수령의 공간답게 향청이나 질청에 비하여 규모가 훨씬 크고 더욱 공들어 치장되었으며 일반 가옥에 비하여 위엄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건(移建)과정과 정경 및 규모에 대해서는 문헌 등에서 잘 서술되어 있는데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성지』 「관우(館宇)」조에는 “성 안의 서쪽 산기슭 사이에 있다. 옛날 아사는 객관 오른쪽에 있었다. 지금의 아사와 구 관청은 언제 옮겼는지 알지 못한다. 1584년(선조 17) 무렵에 군수 이극인(李克仁))이 동헌을 다시 지었고, 최립이 와서 지붕을 고치고 휘장과 장막 주렴 상궤를 정비했는데 매우 화려했다. 뜰 안에 연못 두 곳을 만들고, 하나에는 화분 몇 개를 묻고 연꽃을 심었는데, 땅에서 진흙을 캐서 구워 만들어 물이 새지 않게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1914년 관아는 군내면사무소로 이용되었으며 1919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성군 간성면사무소로 개칭되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공산치하에 있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수복되어 오늘날까지 간성읍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3) 공해(公해)= 조선시대 지방행정 기구인 청사가 위치한 마을로 성읍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안 시설물로 관아는 순 우리말로 ‘마을’이라고도 한다. 공서, 공아, 관부, 관청, 관서라고도 하였는데 특히 공해라는 말은 관원이 모여 나랏일을 돌볼 수 있는 건축물 등을 이야기 한다.
요즘 말로는 관공서를 이야기하며 이곳에 근무하는 이들을 공무원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관아가 설치된 것은 조선시대 보다 훨씬 이전이므로 꼭 조선시대에 국한해서는 안될 것이다. 조선시대 각 고을의 공해는 그 군세의 크고 적음에 따라 건물 규모의 차이만 있었을 뿐 건물의 용도별 종류는 거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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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광섭 칼럼위원(향토사학자) | ⓒ 강원고성신문 |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위원
- 고성향토문화연구회 사무국장
- 논문 : 〈선유담의 고찰〉, <간성
의 만경대와 누정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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