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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성읍치의 상징 700년 넘은 군청 은행나무

김광섭의 고성이야기 <85>조선시대 간성의 읍치경관 연구⑦

2016년 01월 21일(목) 10:05 162호 [강원고성신문]

 

↑↑ 고성군청 앞에 위치한 은행나무는 수령이 7백년 이상의 된 것으로 고려말(1280년)에 심었다는 기록과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하고 있다. 1978년 고성군의 군목으로 지정되었다. 양양부사 정엽의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랜 세월 간성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 강원고성신문

2. 누정(樓亭)시설

보통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말로서 정루(亭樓)·정각(亭閣)· 정사(亭사)라고도 부른다. 평면구조는 정사각형으로부터 직사각형·육각형·팔각형·자형·부채꼴 등 다양하다.
누정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 널리 보편화된 극히 자연스러운 존재였다. 이는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자연경관을 즐기고 이와 더불어 생활하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에서 기인된 것이다. 따라서 누정은 산 좋고 물 좋은 경관을 배경으로 심신의 휴식이나 잔치, 놀이를 위한 기능뿐만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삶을 같이 하려는 정신적 기능도 강조되었다.
1)영월루(詠月樓)= 간성읍성 내 건축물 중에 하나로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객사에 딸린 하나의 공공시설로 지역단위의 특정성으로 인해 정자보다 규모와 법식에 있어서 더욱 고급화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객사와 더불어 많은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곳으로 풍류·교육·접대·공공의식 등의 복합적 기능을 겸하도록 구성되었으며, 즉 정자의 분위기를 가지면서 다양한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간성지역의 누각으로 오랜 동안 부각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관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던 점과 관리함에 있어 편리성에 이점을 가지고 있어 공무 중이거나 여행으로 노독에 지친 사대부, 시인 묵객들의 하나의 볼거리 제공과 휴식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여러 文集, 邑誌 등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조선후기의 여러 지도에서 대표적인 건물로 표현해 주듯이 지금의 고성군청 앞에 있는 은행나무 부근에 위치해 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누정」조에는, ‘객관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詠月樓在客館東), 또한 이식(李植)의『수성지(1633)』 「누대」조에는, 영월루가 어떠한 위치해 있었는지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객관 좌우로 보이는 것이 없다. 오직 이 누각이 평평하게 바다를 마주하고 있어서 봄과 여름에는 해 뜨는 모습이 바로 보이고, 보름날 밤에는 달뜨는 모습이 보인다. 앞쪽으로는 온갖 산이 있어서 성 밖의 들판을 두루 살피기에는 가장 좋은 지세이다. 진사 황집중黃執中)93)이 편액을 달았다. 황집중은 군수 황린(黃璘)94)의 아들로서, 서화 솜씨가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지도서』 「누정」조에는 ‘군의 객사 남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在郡客舍南今廢). 또한『간성군읍지(1812)』 「누정」조에 따르면, 건물의 변천과정과 규모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생각건대 1723년(경종 3) 때 심한 바람으로 무너진 후 다시 세우지 않아 다만 옛날 주춧돌만 남았다. 군수 홍계서(洪啓瑞)가 1780년(정조 4) 봄에 영월루가 있던 자리에 9칸의 2층 누각을 새로이 세웠다.”고 한다.
위의 내용을 소략해보면, ‘해와 달’을 조망하기에 적당한 곳에 위치한 영월루가 간성의 객사와 더불어 적어도 고려 말에 기록하고 있는 허백(許伯)의 시제(題杆城樓, 간성의 다락에 쓰다)에서 누각의 연관성을 밝히고 있듯이 조선전기 1489년 강원도 관찰사 이육(李陸)의 ‘題詠’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대체로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와 1633년 『수성지』이 두 문헌에서도 존재 여부에 대하여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 후로는 『간성군읍지(1812)』에서 1723년 무너진 후 60년(1780)이 되어서야 새로 중수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조선초부터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최소한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되었을 법한데 기록으로 전하는 바가 없는 점 또한 고을 수령의 뜻에 따라 수시로 보수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밖에 없다.
현존하는 영월루 관련 시는 총 29편이다. 대부분 무너지기 이전에 남긴 작품들이다. 1편의 시가 1780년 중수 이후로 1880년 함경도 길주에서 유배되었다가 평해로 이배 되는 도중에 들린 유도수(柳道洙)의 시가 시대적 배경을 가늠케 한다.
오늘날에 간성지역의 시문학에 있어서는 대표적인 면목을 보여주고 있는 이 누각은 주로 강원도와 관계가 있는 관찰사(7), 도사(3), 회양부사(1), 간성군수(2)가 다수를 이루며 금강산 여행 도중에 남긴 작품이 나머지(8)를 차지하고 있다.
대체로 간성객관 시제를 따라 押韻을 사용하였으며, 시대적으로는 15~19세기까지 다양하게 남겨져 있다. 화려했던 누각인 영월루는 지금에 와서는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그나마 문인들이 절창되었던 작품들의 접하게 된 것으로 감사하다.
29편의 작품 중 1589년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구사맹(具思孟)의 작품을 소개한다.

次詠月樓韻杆城
간성 영월루 시에 차운하다.

江城物色轉淸幽
강가 마을에 빛깔 맑고 그윽한데
霽月新經玉斧修
비갠 뒤 달 새로이 옥도끼를 닦으며 지나가네.
鴨脚凄凄籠小院
오리는 농소원에 쓸쓸하고
龍腰隱隱繞高樓
용허리 서리서리 높은 누각 휘감았네.
棲禽拂羽驚難定
숲 속 새들 놀라움에 날개 짓 그칠 줄 몰라하고
列宿韜光讓豈休
별자리 뭇 별들 아스라이 깜빡이니 어찌 그만둘 손가.
獨有不眠今夜客
홀로 잠 못 이루어 이 밤 나그네 되어
還添垂淚憶皇州
흐르는 눈물 더욱 황주를 그리워하네.
『팔곡집권1(八谷集卷之一)』

2) 연정(蓮亭)= 누정은 勝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승지에는 반드시 누정이 있게 마련이고, 승지와 누정에는 찾아오는 騷人들이 많아 자연 題詠이 많다. 어느 지역 막론하고 이름 있는 승지 치고 누정이 없는 곳이 없다. 누정의 시문은 그 누정 자체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대개 누정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만이 소재로 원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누정과 경관은 하나의 자연으로 취급할 수 있다.
대체로 누정은 대부분 지배계층에 의해 설립·운영되었다. 그들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누정을 기반으로 심신을 도야하고 풍류를 즐기는 한편, 당대의 삶과 현실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吐露하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유의 결과를 시문에 담아 노래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산수는 다만 완상의 대상물에 그치지 않고, 인격도야의 방편이자 일상의 삶을 영위해 가는 구체적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간성읍성 내의 蓮亭은 이름에서 말해주듯이 연꽃이 있는 연못가에 6칸을 지은 정자이다.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련 탓도 있겠지만 관아의 수령이나, 관리는 물론이고, 백성들에게 있어서 친숙한 관계를 유지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읍성 내에 영월루가 손님에 접대 목적에 의미가 있는 누각이라면 연정은 자연 그대로 자아내게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亭子의 배경에 대하여 1884년 간성군수 고영희(高永喜)의 『간성군읍지』「성지(城池)」조條에는 “옛날에는 성 안의 양쪽 산기슭 아래가 습지였다. 중년에 이곳을 개척해서 연못 네 개를 만들고 그 중 두 곳에 연근을 심었다. 그 후 군수 임득의(林得義)가 연못 북쪽에 활터를 만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헐어버렸다. 1632년(인조 10)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군수가 되었을 때 연못 세 곳을 수리하고 조그만 언덕을 쌓았으며, 그 가운데에 정자를 만들려고 목재를 모아두었는데 공사는 하지 못했다. 군수 송희업이 뒤를 이어 그 재목을 가지고 정자를 지었는데 규모가 매우 화려했다. 이식(李植)이 기문을 지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 간성성당 입구 우물.

ⓒ 강원고성신문

↑↑ 고성군청 입구 우물.

ⓒ 강원고성신문


3. 기타시설

삼정(三井)·사지(四池)·오목(五木)= 『고성군지』에는 “간성고을에 설화로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고려 때 원님이 관직에 오래 있으려면 세 곳에 우물을 파고, 네 곳에 연못을 만들고, 다섯 가지의 나무를 심으면 관직에 오래 머물 수 있고 장수한다는 말을 듣고 고을에 우물과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633년『수성지』에서는 “옛날에는 성 안의 양쪽 산기슭 아래가 습지였는데, 중년에 이곳을 개척해서 연못을 네 개를 만들고 그 중 두 곳에 연근을 심었으며, 동문과 서문 사이에 우물 두 곳이 있다”고 하였다.
1897년 작성한「간성군지도」을 살펴보면 읍치의 지형은 장방형으로 우물과 연못에 위치표시를 세부적으로 그려 놓고 있다. 세 개의 우물은 현재 두 개 뿐이다. 하나는 간성천주교 입구 오른편에 안내 표석과 함께 있고(사진 1), 다른 한 개는 고성군청 오르는 길목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사진 2). 나머지 한 개는 토박이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상리 460번지 함희조씨 대지에 있었다가 80~90년대 시가지 도로확장 시에 매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네 개의 연못은 지금 하나도 없다. 「간성군지도」에서 보다시피 연못의 위치가 동문 가까이 표시된 것으로 보아 신안리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될 분이다. 지역 토박이 어른들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수복이 되면서 북쪽이 고향인 피난민들이 고성지역으로 몰려들어와 정착하게 이르렀고 인구가 점차 증가되면서 자연스럽게 간성읍내에 아름다운 경관은 훼손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연못은 완전 매몰되었다고 한다.
어떤 어른 한분은 70년대 초까지 만해도 두 개의 연못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겨울이 되면 어른, 아이 한껏 없이 연못 안에서 썰매를 타고 놀았다고 한다. 지금의 위치가 간성시장 부근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간성시내가 도시화 물결 속에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다.
나머지 오목(五木)에 대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특별하게 파악되는 부분은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은행나무 두 그루가 1950년 전까지 남아 있었으나 암은행나무는 한국전쟁 때에 폭격으로 없어지고 현재 군청입구의 수은행나무가 유일하게 살아있다고 전한다.
군청 입구의 수은행나무와 관련하여 조선시대 양양부사 정엽鄭曄이 1618년 4월 금강산을 유람 길에 이곳에 들러 남긴 「금강록」에는 “저녁에 간성에 들어갔다. 달 아래 영월루(詠月樓)에 올라갔다. 늙은 은행나무가 뜰에 그늘을 드리웠고 새로 핀 연꽃이 엽전처럼 둥글었다.”고 문집에 담고 있다.
고성군청 앞에 위치한 은행나무와 표석(1981.8.15)에는 수령이 7백년 이상의 된 것으로 고려 말 1280년에 심었다는 기록과 함께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하고 있으며, 고성군의 군목(郡木)으로 지정되었다(1978). 양양부사 정엽의 글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오랜 세월 간성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Ⅴ. 요약 및 결론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간성의 읍치영역을 파악하고, 읍치를 구성하는 읍성을 비롯한 정치·지리·역사·문화·어문학 등 주요시설의 입지와 형태를 조사하여 조선시대 간성의 읍치경관 복원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간성 읍치경관의 복원을 통해 지방군현의 하나인 간성 읍치경관의 상징성과 구성상의 특징을 밝혀, 빠른 도시화 과정에서 잊혀져가는 간성지역의 정체성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간성은 역사적으로 삼국의 세력경쟁 속에서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국경지대가 되어 변방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남방문화와 북방문화가 공존하는 문화적인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에 편입되면서 명주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10도 중 삭방도에 소속되면서 5道양계 체제로 지방제도를 개편함에 따라 수성군은 간성현으로 개칭되어 동계에 소속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군의 격에 따라 읍호를 개정하는 과정에 간성군으로 명명되었고, 간성군이 관할하는 8개면 중에 군내면(지금의 간성읍)이 읍치에 해당한다. 간성은 북천과 남천 사이에 두고 높은 산지가 서쪽으로 펼쳐져 영서로 통하는 고개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이러한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읍치는 북천과 남천 일대의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까지 간성군은 연해읍으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동해바다가 인접했기 때문이다. 또한 간성읍치는 진산인 향로봉(마기라산)과 읍성을 보호하는 비보의 역할을 하는 숲 등이 있고, 풍수적으로 명당이라는 곳에 읍치가 입지하고 있어 고려시대 간성의 읍치 공간 구성에 풍수가 적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읍성은 읍치의 서부에 위치해 산지와 평지의 지형적 특성을 활용한 평산성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읍성의 형태는 장방형이고, 읍성 축조 당시에는 성문이 동문·서문 2개였으나 이후 자주 드나들던 통로는 서문보다는 동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읍성의 내부 공간을 살펴보면, 중앙권력을 상징하는 중심시설인 객사와 동헌은 중앙에서 서쪽으로 치우쳐있고, 객사와 동헌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문화적 장소가 입지하고, 동쪽에는 농경지로 이용되고, 남쪽에는 취락이 입지해 있다. 또한 이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는 모두 객사와 동헌으로 연결되어 객사와 동헌의 중심성과 상징적 권위를 잘 나타내어 준다.
연정과 영월루의 누정시설은 1872년 지방지도에서 묘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너진 상태이며, 고려 말에서 조선후기까지 오랜 세월 속에서 문인들의 연회장소로 부각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삼정사지는 현재 두개의 우물만이 남아 관리보호하고 있으며 사지는 도시화 과정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간성 읍성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 읍치에 관련된 연구는 전무했고, 간성의 각 기관에서 발행한 서적 등은 각각의 장소에 대한 역사성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해 왔다.
이 글은 조선시대 간성의 읍치 경관을 역사 지리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현재의 행정지도를 활용하여 지형도 상에 복원지도로 표현함으로써 간성의 읍치 경관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조선시대 간성읍치의 주요 장소의 입지와 배치관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읍치는 행정 ·군사적 중심지로서의 기능과 함께 조선왕조의 지배권위가 상징적으로 재현된 역사적 문화경관으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끝>

ⓒ 강원고성신문

김 광 섭

- 향토사학자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위원
- 고성향토문화연구회 사무국장
- 논문 : 〈선유담의 고찰〉, <간성
의 만경대와 누정 고찰〉

강원고성신문 기자  
“행복한 고성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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