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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고장 고성, 화진포는 동해안 최대 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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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의 고성이야기 <90> 화진포의 팔경과 시문학 고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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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5월 31일(화) 15:09 171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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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글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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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18년 지도에서 본 화진포의 지명 | ⓒ 강원고성신문 | | 누구나 자기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고장의 歷史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은 人之常情이 아닌가 한다. 필자도 그 방면의 전문 지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자신의 직업과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고장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그래서 지역에 관련된 것은 新刊이든 古書든 또 그 밖의 資料든 이 고장과 관련이 있는 기록물이면 낱장으로 地圖한 장에서부터 두툼한 서책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는 대로 모아온 터이다.
그리고 시간을 만들어 이 고장과 관련이 있는 유적지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현장을 답사하기도 하고, 지역의 토박이를 만나 구술 자료를 수집해왔다. 얼마 되지 않는 자료지만 이번 논문의 기초로 삼았다.
행정구역상 고성군에는 화진포 이외에도 4개의 석호가 더 존재하고 있다. 석호마다 유래가 있고, 역사가 있다. 대체로 동해안 석호들이 무차별 개발에 밀려 몸살을 앓고 있는데 반해 고성군의 석호는 아주 양호한 편이다.
특히 화진포는 동해안 석호 가운데 가장 크며 보존 상태도 매우 우수하다. 주변에는 선사시대 고인돌과 고적명소 유적지가 있는 관계로 일찍부터 고고학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해양박물관·안보전시장과 근대문화 유산에는 등록되지 않았지만 오래 된 건물들이 즐비하여 매년 호수와 해수욕장을 찾는 인파는 인산인해(人山人海)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단편적이나마 조선시대 남긴 시 한 구절을 의미해보면,
‘만경창파 맑은 호수 그 가운데 자리하고 / 봄바람에 잔물결 출렁이네 / 살구꽃 물가를 뒤덮었고 버들은 휘늘어졌다네 / 비구름 걷히고 하늘이 맑아지니, 붉은 석양 출렁이며 햇살을 쏟아내네.’
3월 어느 봄날에 화진포를 찾은 희암(希菴) 채팽윤(蔡彭胤)이 읊은 서정시이다.
오늘날 화진호는 ‘꽃 나루’ 이름과 함께 남한지역의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큰 석호이다. 그러한 관계로 여말선초부터 지금까지 이름(지명)도 다양하다.
고려 말 문집에서는 열산호(列山湖)라고 밝히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한자가 바뀐 열산호(烈山湖)부터 화진포(花津浦)·화진호(花津湖)·화진포(和眞浦)·화진포(華津浦)·포진호(泡津湖) 등이 전하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이러한 관심 속에 석호의 고장이자 고성군 명소 하나인 ‘화진포’ 관련하여 지금까지 구전으로 전하는 화진 팔경과 조선시대 관찬·사찬지리지, 지도, 문집에서 나타난 화진포의 역사와 지명 유래, 그리고 사대부 시인 묵객들이 남긴 기행문과 한시를 통해 화진포의 실체와 정체성을 규명하여 고성의 역사 문화를 정립할 수 있는 초석을 다질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Ⅱ. 화진포의 인문·사회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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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화진포의 형성과정 | ⓒ 강원고성신문 | |
1. 동해안 석호 생성과정
강원도 강릉시 경포호에서 고성군 화진포까지 7번 국도를 따라 112㎞ 길을 달리다 보면 도로 양쪽으로 호수가 유난히도 많이 눈에 들어온다. 강릉의 향호, 경포호, 양양의 매호와 쌍호, 속초의 영랑호와 청초호, 고성의 화진호와 송지호, 천진호, 봉포호, 광포호 등이다.
이들 호수는 오랜 옛날 바닷물이 육지로 밀려 들어왔다가 갇혀서 만들어진 석호로 신생대 제4기를 대표하는 지형 가운데 하나이다. 약 1만8,000년 전부터 마지막 빙하가 물러가면서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해 약 6,000년 전 현재의 해안선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때 동해안이 침수되는 과정에서 산지 말단부의 골짜기 깊은 곳까지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좁은 만을 형성되고 톱니와 같은 해안선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후 배후 산지에서 하천을 타고 운반, 퇴적된 모래가 연안 조류와 파랑(波浪) 작용으로 사주(砂洲)를 형성하고, 이어 사주가 성장하여 만의 입구를 막아 바다와 격리된 호수들이 생겨났다. 해안 지형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시기가 대략 3,000년 전이라 말한다. 금강산 끝에 자리한 삼일포를 비롯하여 화진포, 청초호, 영랑호, 경포호 등 동해안에 발달한 석호는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자연호수들이다.
동해안의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이야기할 때 석호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지금으로부터 8,000~3,000년 전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주로 해안이나 하천 주변에 주거지를 마련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하천이나 바다 쪽으로 열린 작은 만이었던 석호는 인간 생활에 적합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호수 주변의 낮은 구릉지를 농경지로 이용하고 쉽게 고기를 잡을 수 있는 환경을 최대한 활용했을 것이다. 청동기 시대의 집단 취락지가 발견되면서 유물 가운데 농업용 도구인 반달돌칼과 큰 어망추는 당시 사람들이 호수 주변에서 농사와 고기잡이를 하며 생활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화진포 근처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무려 32기나 발견되었다.
이러한 지형을 뒷받침 하듯 조선시대 인문지리서《팔역지(八域誌)》를 살펴보면, ‘강원도 동쪽은 바다를 따라 각 군이 바다 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는데 영동(嶺東)이라고 부르고, 그 서쪽은 산에 의지해 각 군이 대부분 높고 평탄한 까닭에 영서(嶺西)라고 부른다. 영동지방은 嶺의 등줄기가 이미 서북쪽을 막고 있으나, 동남쪽은 바다와 나란히 하여 멀리 통한다. 지세(地勢)가 비록 좁고 협소하지만 태백산 아래에 있는 야산(野山)은 대부분 낮고 평평하며 밝고, 빼어나다. 동해는 밀물과 썰물이 없기 때문에 물이 혼탁하지 않아 벽해(碧海)라고 부르며, 항구와 섬으로 막히지 않아서 마치 큰 못이나 평평한 못에 임한 것처럼 앞이 확 틔어 웅장하다. 땅에는 이름난 호수와 기이한 바위가 많아서 높은 곳에 오르면 넓은 바다가 아득히 펼쳐지고, 계곡에 들어가면 물과 돌이 아름다워, 경물(景物)이 실로 나라 안에서 으뜸’이라고 하였다.
《수성지(水城誌)》 〈산천(山川)〉조에서는 ‘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은 전부 고개인데, 여러 산들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고개의 등허리에서 벗어나 별도로 솟아오른 봉우리이기 때문이다. 군의 하천은 산에서 내려오면 폭포와 시내가 되고, 골짜기에 들어가면 시냇물이 되니 이따금 감상할 만하다. 하천이 들에 이르러서 평평한 개울이 되는데, 이 물이 터서 바다로 들어가면 절벽들이 평평하고 곧아서 물이 소용돌이치는 일이 없게 되니 그 기세가 볼만하다. 혹은 골짜기로 흘러들어 고여서 느리게 흘러가면 동북풍이 불어 바닷물이 일렁이고 모래와 돌이 그 입구를 막게 되면 물이 고여서 호수와 담수가 되는데, 호수물이 매우 맑아서 모래와 자갈까지 투명하게 보인다. 두 벼랑이 우뚝 솟고 굴곡을 이루어 기이한 형세를 이루고 있다. 위로는 고개이고 아래는 바다여서 사방이 시원스럽게 보여 영동에서 이곳이 가장 기이한 형승인데 간성 경내의 호수(潟湖)가 남북에서 가장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 고성군은 동해안 지역에서 가장 많은 석호를 가지고 있는 군이다. 군청이 소재하고 있는 간성읍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화진포, 남쪽으로 송지호, 천진호, 봉포호, 광포호 등이 존재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이 조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束草市에 있는 영랑호가 杆城郡이 관할하는 호수였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이 지역에 호수만 총 6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호수(潟湖)의 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 남인학자 이만부(李萬敷)는〈지행부록(地行附錄)〉 동계(東界)條에서 간성(수성)의 대표적인 3대 호수는 화진포(花津浦), 광호(廣湖), 영랑호(永郞湖)라고 하였다.
또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인 최유해(崔有海)의 〈영동산수기(嶺東山水記)〉에서도 ‘간성에는 영랑(永郞)이라고 하는 호수와 화진(花津)이라고 부르는 두 호수가 있다. 모두 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인데 영랑은 기이한 바위들이 있고, 화진은 기이한 나무들이 많아 두 곳 다 빼어나다고 할 만한 경개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관심의 일환으로 동해안 지역의 자연경관자원에 대한 활용과 그 자원화 인식은 높은 편이며 아울러 고고학, 인문사회, 민속 문화, 어로작업에 대한 조사와 연구 성과들도 꾸준히 지속화 되었다.
특히 화진포 지역은 1960년대 이화여대 최숙경(崔淑卿) 교수가 지표조사를 실시한 후 1995년 강릉대학교 박물관에서 3차례에 걸쳐 지표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이후에도 2000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2003년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서 고성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를, 2005년 문화재청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문화유적분포지도를 발간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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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광섭 칼럼위원(향토사학자) | ⓒ 강원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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