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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팔아서 먹고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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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의 고성이야기 < 99 >간성 괘진리와 능파대 관련 고찰 ③
19세기초 <임원경제지>에 1·6일 괘진장 열린다는 기록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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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08일(목) 14:10 184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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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촌지역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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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872년 「간성군지방지도」 ‘해진(海津)’ 부분 | ⓒ 강원고성신문 | | 해진(海津)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은 1664년 간성군수로 떠나는 한 친구(朴吉應, 1598∼?)에게 보낸 편지에서, “간성은 옛날의 수성으로 예맥(濊貊)의 밖 동해 바닷가에 있으며, 서울에서 600리 떨어진 곳이다. 나는 일찍이 난리를 피해 관동(關東)으로 나간 적이 있으므로 그곳의 풍토와 습속에 익숙하다. 그곳 백성들은 질박하고 촌스러우며, 토질은 척박하여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팔아서 먹고 산다”라고 간성지역의 풍토와 풍습을 기술하고 있다.
간성군수(杆城郡守)로 부임하는 박덕일(朴德一)을 전송하는 서(送杆城郡守朴德一序). “杆城古之수城 在예貊之外東海上 郡去京都六百里 吾嘗避亂出東界 習其風土謠俗 其民樸鄙土瘠 逐魚鹽之利 無文獻可尙 而東海皆沙海”
조사대상지인 죽도면 괘진리는 관아로부터 30리에 위치한 지역으로 관청에 공물을 바치던 곳이다. 특히 곽(藿, 미역)의 주생산지로 유명하여 이곳에서 나오는 미역은 품질을 으뜸으로 쳤다.
19세기초 『林園經濟志』에는 괘진장(掛津場)이 1,6일 開市한 기록으로 보아 이곳에서 시장형성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가 있다.
동해안 일대의 항포구가 위치한 곳에는 ‘진(津)’이라는 지명이 대다수가 확인된다. 간성군(杆城郡) 또한 어촌 배경을 살필 수 있는데 1633년 현감 이식(李植, 1584~1647)이 기록한 『간성지(杆城志)』에 의하면, “군내 지역의 여러 방(坊)은 모두 바다를 경계로 한다. 어호(漁戶)가 사는 곳에서 배가 정박할 수 있는 곳을 진(津)이라고 한다. 대개 큰 고개와 여러 산자락들이 때때로 바닷가로 들어와서 바람과 파도에 깎여 흙이 무너지고 돌이 드러나 산림처럼 빽빽하고, 물에 의하여 평평해진 것이 대(臺)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李植. 1633,『杆城志』, 海津條. “郡地諸坊皆以海爲界漁戶所居船접可泊處謂之津大槪大嶺群麓往往逼入海諸爲風濤割削土斷石出離立森堅倚水而平者爲臺揷水而出者爲嶼以松林粧以花卉無非可觀而凌波萬景二臺以在官道傍故獨以形勝擅名”
조선후기인 1872년 「간성군지방지도」에서 간성군 어촌지역의 변화과정을 확인할 수가 있다.
1631년(인조 9년)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가을에 금강산을 유람 한 뒤에 남긴 기행문으로 「유금강소기(遊金剛小記」에는 간성지역의 어촌정경을 엿볼 수 있다.
“동해의 배는 나무를 파서 만드는데 네댓 명이 탈 정도이다. 입이 큰 물고기를 낚아서 생업을 유지한다. 해가 뜨면 돛을 펼치고 바다로 나가는데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다. 저녁 무렵에 한 점 배가 하늘 저 너머에서 오는데 갑자기 언덕에 배를 대니 그 배의 빠름을 알 만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東海접子 고木爲之 可容四五人 以釣巨口魚爲業 日出便張帆而出 瞬息不見 모時一點從天外來 俄卽泊岸 可知其輕快飛”
<※일부 지원되지 않는 한자는 한글로 표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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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김 광 섭
- 향토사학자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위원
- 고성향토문화연구회 사무국장
- 논문 : 〈선유담의 고찰〉, <간성
의 만경대와 누정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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