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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곰과 우마(牛馬)가 뒤섞여 사방으로 달리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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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의 고성이야기<100> 간성 괘진리와 능파대 관련 고찰 ④
지리지와 기행문에 능파대 절경 감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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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3월 28일(화) 10:45 191호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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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18년 ‘掛津里(문암2리)’ 지형도. | ⓒ 강원고성신문 | |
Ⅲ. 능파대 역사적 고찰
1. 지리지에 나타나는 능파대
(1) 李植의 『杆城志』= 간성현감 이식(1584~1647)이 1633년(인조 11) 저술한 『간성지』樓臺條에는 ‘능파대’ 관련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살필 수 있다.
“능파대는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바위 언덕이 구불구불 이어지면서 바다 속까지 들어갔다. 층층이 몰려오는 파도가 부딪쳐서 흩어지는데, 그 꼭대기에 앉아서 내려다보면 돌 모양이 기괴한 모습에 눈이 부시다. 마치 큰 곰과 우마(牛馬)가 뒤섞여서 사방으로 달리는 듯하다.”
(2) 柳馨遠의 『輿地圖書』= 실학자 유형원(1622~1673)이 기록한 1757년∼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成冊)한 전국 읍지(邑誌)이다. 간성군(杆城郡)은 1759년(영조 35)에 작성되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능파대(凌波臺)는 고을의 남쪽 20리에 있다. 바위 언덕이 구불구불 이어지면서 바다 속까지 들어간다.”
(3) 高永喜의 『杆城郡邑誌』= 간성군수 고영희(1849∼?)에 의해 1884년(고종 21) 만들어진 『간성군읍지』내용에는,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능파대(凌波臺)는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중략… 층층이 몰려오는 파도가 부딪쳐서 흩어지는데, 그 꼭대기에 앉아서 내려다보면 돌 모양이 기괴한 모습에 눈이 부시다. 마치 큰 곰과 우마(牛馬)가 뒤섞여서 사방으로 달리는 듯하다.”
(4) 吳宖목의 『輿載撮要』= 오횡목(생몰년대 미상)이 1887년(고종 24) 저술한 지리서 여재촬요 간성군 樓亭條에는 여러 지리지에 별다른 차이점이 보이지 않는다.
(5) 「地圖」= 1896년에 만들어진 『수성읍지』에 수록된 이 지도 이름은 「간성군지도(杆城郡地圖)」이다. 지도에 묘사된 간성군 전체를 마을지명과 건물이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능파대의 모습은 돌들이 층층이 쌓여져 봉우리를 그려내고 있다. 이 자료는 간성지역의 연구하는 향토자료로서 史料的 가치가 높다. 반면에 종로도서관에 소장된 「한국근대지도」는 1916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 의해 만들어진 이 地圖에서 마을의 엣 지명과 능파대 부근의 지형을 살필 수 있다.
2. 기행문에 나타나는 능파대
여기서 살펴보려는 기행문은 雜記에 해당하는 글로 형식이 자유롭고 소재 또한 다양하다. 기(記)와 록(錄)은 산천을 유람하면서 견문하고 체험한 기록하는 양식의 글이다.
기행문 유람 경로를 보면 금강산, 관동팔경을 목적을 두고 쓴 작가들의 노정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을 둘 수 있다. 그 하나는 내금강에서 외금강으로 오는 경로이고, 다른 하나는 외금강에서 시작해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노정이다. 본고의 기행문은 두 가지 노정을 전부 밟고 있다.
(1) 洪仁祐의 「關東錄」= 홍인우(1515~1554)가 1553년(명종 8) 4월 9일부터 許忠吉(國善)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는 동안의 기행을 일기체로 쓴 글이다. 간성지역의 능파대에서 바라본 모습은 凌波臺를 섬(島嶼)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월 2일 아침 김사문(金沔, 간성군수)이 초청하여 우리 세 사람(남시보, 허국선, 홍인우)이 가서 잠깐 만났다. 또 7,8리쯤 가니 하얀 모래가 눈과 같다. 사람과 말이 지나가니 쟁쟁 소리가 난다. 이것이 명사(鳴沙)이다. 영동 지방의 바닷길은 모두 그러한데, 고성에서부터 여기까지가 더욱 그렇다. 해당화가 있어 어떤 것은 어지러이 피어있고 어떤 것은 이미 열매를 맺기도 했다. 역시 기이하고 아름답다. 또 가서 능파도(凌波島)에 올랐다. 섬의 서쪽은 모래 길과 연결되어 있다. 빼어난 봉우리가 바다 어귀까지 우뚝 솟아 있는데, 기괴한 바위들과 괴상한 돌들이 종횡으로 섞여 우뚝 서 있다. 우리 세 사람은 각기 한 봉우리씩을 차지하고 앉아서 경치를 즐겼다. 바다와 맞닿은 하늘은 맑고 아름다운데 만 리나 되는 푸른 바다는 탁 트인 채 그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잠시 후 갑자기 동풍이 불자 성난 파도가 해안을 들이치는데 마치 천군만마(千軍萬馬)가 마구 달려오는 듯하다.”
(2) 鄭曄의 「金剛錄」 = 정엽(1563
~1625)이 襄陽府使로 재직하면서 1617년(광해군 9) 윤4월 1일 서울에서 온 두 사위 羅萬甲과 李尙質 그리고 손자 援, 낙산사 주지승 元祐를 데리고 양양을 출발하여 14일 동안 금강산 유람 하고 다시 내려오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간성에서 서술한 내용을 보면 작자는 1541년 鄭士龍의 詩題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침을 먹고 10리쯤 가니 산 한 자락이 물 가운데 들어가 있는데 이름하여 능허대(凌虛臺)라고 하였다. 능허대 앞에 여러 개의 바윗돌이 쌓여 작은 섬을 이룬 곳이 있는데 나군과 이군 두 사위는 서둘러 그곳에 올라가 구경을 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3) 李命俊의 「遊山錄」= 이명준(1572~1630) 은 1628년(인조 6) 4월 12일에 江陵府使로 공무 중에 틈을 내어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것이다. 아들 顯基와 元基, 朴時昌 등과 동행하였다고 적고 있다.
“…중략…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어촌 마을에서 저녁연기가 올라오고 있다. 겹겹으로 이어진 산과 고개는 구름 가에 아름답게 서 있고, 저녁놀은 비추었다 사라졌다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다. 내가 ‘앞쪽 경치가 뒤쪽 경치만 못하다’고 하자, 따르는 이들도 모두 그렇다고 한다.”
(4) 趙秉鉉의 「金剛觀敍」= 조병현(1791~1849)은 1819년(순조 19) 9월 6일에 도성을 출발하여 동생 및 친구들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면서 기록을 남겼다.
(5) 宋秉璿의 「東遊記」= 송병선(1836~1905)18)18)은 1868년(고종 5) 봄에 족숙 宋翊洙, 金龍赫, 李致達, 朴承浩 등과 함께 金剛山과 관동지역을 유람하고 지은 것이다. 돌아오는 길을 일정별로 나누어 기록하였다.
(6) 許薰의「東遊錄」= 허훈(1836∼1907)은 1898년(고종 35) 작가 나이 63세 되던 해 4월에 이수악(李壽岳)과 함께 關東八景, 金剛山, 五臺山을 유람하고 일기체의 기행문을 지었다. 능파대 관련한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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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광섭 칼럼위원(향토사학자) | ⓒ 강원고성신문 |
- 향토사학자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위원
- 고성향토문화연구회 사무국장
- 논문 : 〈선유담의 고찰〉, <간성
의 만경대와 누정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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