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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 ⑪

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2018년 11월 13일(화) 08:50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어릴 때 추석과 같은 명절은 추석빔/ 설빔을 얻어 입을 수 있고, 친척들을 만나는 그리고 달맞이도 하며 소원도 비는 그야말로 명절(名節)이었다. 우리 집은 이른바 큰집으로서 명절이면 경향 각지에 흩어져 있는 형제자매와 아재(삼촌)들이 모여들었다. 좁은 집은 순식간에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해지곤 했다. 조카들이 어릴 때도 그랬지만, 그 시절이 지나서 이제는 그 조카들이 낳은 아이들 그러니까 손주들까지 모여서 도떼기시장이 되곤 했다. 다시 말하면 삼대도 아니고 사대가 함께 모이는 것이었다.
사람멀미를 하는 내게는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니었고, 돌이켜보면 조카들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조용히 해!”였지만 손주들은 또 달랐으므로 기꺼이 내 방을 내주기는 했지만 그것은 아마도 며칠뿐이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었다. 이번 추석에도 형제들 내외와 조카들 그리고 손주들이 왔다. 매해 추석이면 오시던 작은아버지네는 사정이 있어 귀성이 취소되었다. 사촌자매들 또한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명절에 얼굴을 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부모가 나이가 들면서 명절이 가까워 오면 집 안팎 닦달을 하는 일은 오로지 내 몫이 되었다. 보름 전부터 슬금슬금 청소를 시작하는데, 무엇보다 냉장고 청소가 사북이었다. 노인인 어머니는 냉장고를 만능으로 여겼으므로 생선을 비롯한 식품은 죄다 냉장고에 무져놓기 일쑤였다. 냉장고라고 유통기한이 없을 수 없었으므로 채소는 썩었고, 생선은 오래되어 쑤들쑤들했으니 모짝 들어서 내다버렸다. 이따금 찬장에 있는 오래된 그릇들을 두서너 개씩 빼서 버렸으나 노인은 알아채지 못했다.
신라의 가배(嘉俳)에서 시작되었다는 추석(秋夕)은 한가위, 중추절 등으로 불렸으며 여전히 중요한 명절 가운데 하나였다. 길쌈을 하였다는 말과 함께 추석이면 상투어처럼 되뇌는 말 가운데 ‘오곡백과(五穀百果)가 무르익고’라는 말은 근대 이전 우리가 농경 민족이었음을 함축하고, 환기하는 것이었다. 그랬으므로 가을한 햅쌀로 오례송편을 빚고, 배와 사과를 거둬 제사상에 올릴 수 있었으나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전체인구(*2018년 9월 현재 5천 1백여 만 명) 가운데 농가인구 비율은 4.7%로 농가인구 수는 242만 여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런 가운데 팔월대보름이라는 용어 자체가 의미하듯 대보름이 상징하는 저녁 달맞이, 그 둥그렇고 환하며 기운차고 밝은 달빛이 온누리에 퍼져서 우리는 그저 두 손을 모으고 허리 숙여 절하며 소원을 빌었다. 그것이 세계 평화이든, 가족의 건강이든, 아니면 복권 당첨이든 무엇인가 간절히 희구하는 순간만큼 우리는 흰 빛의 달처럼 정결하고 따뜻하며 삼엄해질 수 있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가을밤 검푸르접접한 논들에 내려앉는 희고 드맑은 달빛은 그것만으로도 넉넉히 아름다웠다.
내 아버지는 다섯 남매 가운데 맏이, 장남이었고 할아버지한테 혹독한 훈육을 받는 동시에 근현대 교육을 받은 이였지만, 할아버지가 생존해 계셨고,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그야말로 제사(祭祀)와 죽은 조상들 생일차사(生日茶祀) 사이를 살았다. 아닌 말로 매일 제사였다. 그리고 명절과 제사 뒤에는 반드시, 어머니 단어로 동네 어른들을 불러 ‘제끼(겪이)’를 했다. 사랑방, 할아버지 방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 집안이 유서 깊은 가문이었으냐, 이름 있는 명망가 집안이었느냐 아니면 부잣집이였으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그렇게 지내다 드디어 신식 교육을 받은 어머니 주장으로 도시로 분가하기에 이르렀고, 도시로 이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조부모와 합가를 했지만, 그때는 이미 할아버지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또한 도시였으므로 생일차사 같은 제사는 지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할아버지께서는 조상들 기제사를 내겐 증조할아버지, 즉 할아버지의 아버지 제삿날로 통합하여 마치 시제를 지내듯 한꺼번에 제사를 지내겠다고 선언했다.
후손들이 경향 각지에 흩어져 한날한시에 모이는 게 어렵다는 이유였다. 그때가 1980년대 초였다. 그리하여 우리 집은 조부모 살아생전에는 일 년에 세 번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 조부모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1990년대 초 다시 귀향하게 된 내 부모는 다섯 번의 제사를 증조할아버지 제삿날로 통합하였고 얼마 동안은 일 년에 세 번 제사를 지냈으며 그때까지 내 오라비들과 작은 아버지들은 제사에 참례하지 않았다. 그러다 우리 어머니는 다시 증조할아버지 제삿날 지내던 통합 제사마저 없앤다고 조상께 고하고, 그리고 아버지 형제자매들에게 통보했다. 누구도 반발하지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불만을 드러낸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제수(祭需)를 준비하는데 엄격하지도 그렇다고 소홀하지도 않았지만, 생선과 과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크고 좋은 머드러기여야 했다. 그리하여 음식 장만을 하는 어머니의 맏며느리인 내 큰올케는 매번 찜통에 들어가지 않는 생선 때문에 불만을 드러냈다. 낼모레면 아흔이 되는 어머니는 여전히 곳간 열쇠를 당신 맏며느리에게 넘기지 않았으므로 내 큰올케는 제수 준비 권한이 없었다. 권한이 없었으므로 책임질 일도 없었으나 그이 또한 손주를 본 할머니였다. 교회에 나가며 성묘조차 하지 않는 작은올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제사, 제향(祭享)의 뜻이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굳이 농경 민족과 엮을 필요도, 유교 사회와 관계 지을 필요도 없겠으나 의례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해 한두 번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조상을 추모하고 각자의 소원을 축원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겠으나 형제자매라고 해도 이미 우리는 아주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다. 두 명뿐인 내 오라비들은 경상도와 경기도에 살고 있었다. 아무리 자동차 주행 거리가 짧아졌다고는 해도 하루를 온전히 오고가는 일에 써야 했다. ‘명절 증후군’이란 신조어가 생겨난 배경에는 이와 같은 이유도 있을 것이었다.
농업학교를 나와 농사를 짓던 아버지를 둔 우리 오남매 가운데 농사를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아버지 형제 오남매 가운데 평생 농사를 지은 이는 작은아버지 한 명뿐이었다. 우리는 이미 농사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버덩을 일구고, 하천을 개간하여 논과 밭을 만들었던 이들은 이제 흙으로 돌아갔고, 그렇게 일궈 농사짓던 땅들은 축사가 되거나 태양광발전소가 되어갔다. 농촌에 살면서 ‘농협 마트’에서 쌀과 과일 심지어 배추와 무, 파와 마늘을 샀다. 장바구니에는 국내산 과일 대신 칠레산 포도, 미국산 오렌지, 필리핀산 바나나로 채워졌다. 생선은 또 어떤가. 바닷가에 살면서 노르웨이산 고등어, 러시아산 명태 아니면 대만산 꽁치 통조림을 먹었다.
명절 전날 종일 앉아 전(煎)을 부쳤다. 러시아산 명태로 명태전을 부치는데, 콩기름의 콩은 또 미국산이었다. 일일이 따지고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사내 조카에게 달걀을 풀라고 이르고, 제물로 올릴 접시에 전을 가지런히 놓지 못하는 조카에게 잔소리를 할뿐,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추석 당일, 성묘를 마친 오라비들은 귀갓길을 서둘렀다. 노모는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도 햅쌀은 물론 과일까지 챙겨서 아들들 자동차에 싣도록 했다. 굳이 과일까지, 곁에 있던 나는 기어이 한소리 했다. 도시에 사는 이들은 과일이나 공산품은 쉽게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룻밤 묵고 바로 떠나는 오라비들이 반갑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유쾌한 것만은 또 아니었다. 뒤에 남은 나는 이불빨래며 설거지, 청소 등을 해야 했으므로. 그리고 일곱 마리 유기묘를 기르는 작은오빠네는 그 고양이 밥 때문에 매번 서둘러서 떠났으므로. 집에는 늙은 아버지가 자리보전하고 있었는데도.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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