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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숲으로 [34]

향토소설가 김담 연재 산문(散文)

2019년 12월 18일(수) 10:37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푸른 깁을 펼쳐 놓은 듯한 하늘에 홀려서 논들을 서성거리던 중이었다. 언제부턴가 전봇대 꼭대기에 수리부엉이가 한 마리 앉아 있곤 했다. 소리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는 수리부엉이는 멀리서 보면 검은 점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점점 더 확대되어 어린아이만큼 커졌다. 고개만 움직이면서 사방을 살피다가 어느 순간 쏜살같이 논배미로 처박히곤 했다. 빈손이었다. 지켜보는 마음은 안타까웠지만 수리부엉이는 또 다른 전봇대 꼭대기로 옮겨 앉아서 똑같은 자세로 고개만 돌리면서 사냥감을 찾곤 했다. 어느 날은 북쪽 숲정이 부근에서 만났다 헤어진 뒤 동네를 한 바퀴 돌아서 집 앞 부근에 이르렀는데 그곳 냇둑 전봇대 꼭대기에 앉아있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울지도 않는 부엉이라고 구두덜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거미가 내릴 무렵이었다. 전봇대 꼭대기에 수리부엉이가 앉아있었고, 멀찍이 떨어져서 수리부엉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난데없이 새 한 마리가 날아오다가 엉거주춤하는 사이 수리부엉이는 낮고 굵은 음성으로 ㅤㅂㅝㅇ, 하고 짧게 울었다. 그러기도 전에 새는 벌써 기겁하여 방향을 틀어 달아나는 중이었다. 수리부엉이는 그러면서도 새를 쫓아가지는 않았다. 다시 논배미로 내리꽂혔다. 또 허탕이었다. 안타까움으로 발을 굴렀다. 수리부엉이는 남쪽으로 날아갔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며칠째 수리부엉이를 쫓느라고 예정된 산책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지만 수리부엉이를 구경할 수 있다면 그쯤은 또 아무렇지도 않았다.
미친바람이 지나간 뒤 하룻밤 새 숲정이에는 겨울이 내려앉았고, 헐거워진 그 사이로 찬바람이 술렁거렸다. 어쩌다 한두 이파리 낙엽들이 남았으며 큰 산 까치봉에는 겨울눈이 하얗게 쌓였다. 가을과 겨울은 매번 어름사니 줄타기하듯 아슬아슬, 안타까웠다. 그런데도 지르되게 핀 민들레는 또 샛노란 꽃을 피워서 걸음을 잡아챘다. 봄에 만난 민들레를 늦가을에 다시 만난다고 해서 썩 반가운 것도 아니었다. 때때로 늦가을 서리가 내려서 이파리들이 거무죽죽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앉아서 민들레꽃을 들여다보다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어디서 타닥타닥 장작불 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앉아있던 자리 오른쪽에는 냇가까지 이어지는 긴 봇도랑이 있었다. 저수지 문을 닫았는지 봇도랑에는 물이 거의 흐르지 않았다. 소리의 진원지는 봇도랑이었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멧돼지였다. 해는 지고,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밤은 또 오지 않은 어스크레한 낮과 밤의 경계에 있었으므로 멧돼지는 언감생심이었지만, 눈앞에서 코를 벌름거리며 방향을 돌리는 멧돼지를 어쩌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기척에 놀란 멧돼지는 봇도랑을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렸으나 끝내 내 무릎 높이의 봇둑으로 올라서지 못했다. 휴대폰을 꺼냈으나 멧돼지 움직임이 더 빨랐고, 사진을 찍는 일은 이내 체념했지만 지켜보는 일은 포기할 수 없었다. 봇둑으로 올라서지 못한 멧돼지는 오던 길을 도섰다. 그러나 뛰지는 않았다.
멧돼지는 새끼는 아니고 그렇다고 또 중돝은 못 되는 어중간한 크기였다. 그런데 왜 마을 쪽으로 그것도 혼자 내려왔을까. 얼마동안 멧돼지 뒤를 따라가다 보니 봇도랑이 도로 아래 땅속으로 이어져 있었고, 한동안 지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땅 위 이차선 도로에는 차들이 오고갔다. 왼쪽으로 꺾으면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직진하면 태양광발전소와 맞닥뜨렸으며 오른쪽은 숲정이로 이어지고 있었으나 이 또한 태양광발전소 모듈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으므로 괜한 조바심으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자동차가 두어 대 지나간 뒤였다. 땅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을 깨끗이 씻어주기라도 하듯 멧돼지는 어느 새 논길로 나와서 또다시 타닥타닥 걸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뒤를 따랐다.
아침에도 인제군청에서 보낸 ‘안전안내문자’가 도착했다. 아프리카 돼지열병(ASF) 확산 차단을 위해서 멧돼지 포획을 실시하니 입산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날은 강원도청, 어느 날은 인제군청, 또 어느 날은 고성군청 등으로 발신처가 바뀌었지만 내용은 한결같았다. 얼마 전에는 우리 마을 큰 산에서도 사냥꾼을 동원한 멧돼지 사살 작전이 진행되었다. 저녁마다 산 기스락을 따라 돌아다니는 나를 본 마을 이장은 사살 작전이고, 실탄을 장전했으니 산 근처에는 가지 말라고 두어 번 경고했다.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는 멧돼지는 어미가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한꺼번에 몰려다녔다. 봇도랑에서 만난 멧돼지는 아무리 봐도 올봄에 태어난 것으로 짐작되었는데, 어쩌다 혼자가 되었는지, 그리고 왜 뛰지는 못하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멧돼지는 타닥타닥 앞서 걷기만 했다. 수백 미터를 그렇게 뒤에서 따라갔다. 논배미를 가로지른 멧돼지는 가까스로 숲 기스락으로 들어섰다.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히는 소리가 멧돼지가 어디만큼 있는지 알려주었다. 소리를 쫓아 한동안 나무들 사이를 지켜보았다. 멧돼지는 매우 날랜 산짐승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어린 멧돼지는 겨우겨우, 뒤에서 인기척이 나는데도 그저 걷기만 했다. 애가 씌웠다.
낙엽 밟는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숲 기스락 옆으로 난 길로 들어섰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 숲정이로 들어서는 멧돼지를 보았으므로 걸음은 자연스레 조심스러워졌다. 그 어린 멧돼지가 오래오래 제 명대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저 한낱 꿈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북쪽으로 가려고 하면 철책이 가로막았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이번에는 아프리카 돼지열병 감염원이라는 이유로 사냥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다 멧돼지들은 마을 밖, 숲 밖으로 내몰리면서 합법적으로 무차별 사냥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군사분계선 철책으로 인해 남북으로 왕래하지 못하는 상황도 답답했는데, 이제는 사냥꾼들 눈에 띄는 순간 멧돼지에겐 죽음뿐이었다.
가축들 전염병이 돌 때마다 가축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구제역이 돌면 소가 생매장되었고, 조류독감이 유행하면 닭들이 구덩이 속으로 내던져졌다. 이번에는 듣도 보도 못한 아프리카 돼지열병이었다. 집돼지뿐만 아니라 멧돼지까지 수난이었다. 얼마 전 텔레비전으로 연천군에서 살처분한 집돼지들이 흘린 피로 시뻘겋게 변한 강물을 보았다. 아마도 지옥의 풍경이 그와 같을 것이었다. 살처분(殺處分)을 당하는 짐승은 병에 걸려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웃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멀쩡한 짐승들까지 생매장해야 하는지 궁금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욕망이 부른 화를 왜 애먼 짐승들에게 떠넘기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사방이 어둑어둑했으나 발씨 익은 길인지라 내처 걸었다. 논길이라고 하기에는 수풀이 매우 빽빽한 길이었다. 칡덩굴과 환삼덩굴, 새삼 등 덩굴식물에 뒤덮여서 숨도 쉬지 못하던 나무들이 낙엽이 지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헐거워진 속내에는 찔레꽃 빨간 열매들이 감춰져 있을 때도 있었고, 노박덩굴 노란 열매들이 오종종 매달려 있을 때도 있었다. 무엇을 가린다고 온전히 가려지는 것도 없었을 뿐더러 무엇을 드러낸다고 또 멀쩡하게 드러나는 것도 없었다. 어쩌면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논배미 위쪽에 태양광발전소가 생기면서 아래 논배미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묵정논이 되었고, 근처 논들은 벼농사를 짓기는 하는데 논둑에 제초는 하지 않았다. 트랙터와 트럭은 수풀을 짓깔아뭉개면서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논둑길에는 억새와 갈대 심지어 싸리나무까지 내 키를 훌쩍 넘기며 자라고 있었다. 또한 얼마만큼의 논길은 포장을 하지 않은 흙길이었으므로 더할 나위 없었다. 마을에서 포장을 하지 않은 길을 보기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도깨비바늘이 들러붙어도, 강아지풀이 스쳐도 그만이었고, 이따금 서양쑥부쟁이와 산국에 여태껏 시든 채 남아 있는 꽃봉오리들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퍽 쑬쑬했다.
느실느실 둑길을 걷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한 마리였다. 푸드덕 날개 치는 소리가 들렸고, 순간 걸음을 멈췄다. 곧이어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 거듭하여 까투리 네 마리가 발치에서 날아올랐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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