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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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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문학회> 회원 작품 릴레이 [27] / 박대식(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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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4월 21일(수) 13:21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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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쪽빛 바다, 고즈넉한 자작도 해변은 수심이 낮아 조용히 휴식하며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서핑과 해수욕을 즐기는 젊음의 열정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해변을 걷다보면 몸은 바다와 하나가 되고 파도는 구름이 되어 흐른다.
나의 고향 자작도 해변은 희고 고운 모래 백사장이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고 수심이 낮아 가족 단위의 피서지로 적합하다. 설악산은 바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우리나라의 알프스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떠오르는 태양의 붉은 여명, 운빛 파도와 바위섬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갈매기 배설물로 하얘진 백도가 수석처럼 바다 한가운데 서 있고 그 앞에 자잘 자잘한 바위들이 누워 있다. 자작도는 나지막한 여울물이 파문을 일으키며 넘나드는 바위섬이다.
어린 시절에는 자작도를 이곳 사투리로 ‘재재기’라고 불렀다. 자잘 자잘한 작은 바위가 인가가 가까운 바다 초입에 누워 있고 작은 돌들 사이로 물결이 찰랑찰랑 넘나드는 모습에서 유래된 듯하다. 지금은 자작도로 불린다.
자작도의 옛 이름은 ‘무선대(舞仙臺)’라는 설이 있다. 신라시대에 화랑들이 금강산을 오가던 길에 이곳에서 무예를 익히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자작도는 한때 소금을 생산했다고 해서 ‘염전리’라고 불렸다. 옛날은 소금이 금처럼 귀중한 물건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이 ‘돈 고을’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많은 이북 사람들이 피난 와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임시로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또한 보부상들이 영동과 영서를 잇는 새이령과 마장터를 넘나들며 소금과 해산물을 등에 지고 물목을 교류하던 장터이기도 했다.
몇 년 전, 마을 사람들이 옛날의 왁자지껄한 장터의 모습을 상상하며 작은 장터를 운영하기도 했다.
1990년도 초, 7번 국도의 확장으로 송암리의 도로변에 위치한 집들은 부득이 철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주할 곳을 찾던 중 바닷가를 기고 있는 자작도 마을은 선택했다.
당시 형님께서 이장 일을 맡아 보셨다. 동네 주민과 합심하여 고성군과 건설교통부에 건의하여 모래밭이던 이곳에 옹벽을 쌓고 흙을 부어 택지를 조성하였다. 형님은 평생 농사를 짓고 고향을 지키며 사셨다. 청년 시절엔 4H 회장도 하셨고 후에 마을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이젠 그 당시 분들은 연로하여 떠나시고 외지에서 들어오신 분들이 마을 주민의 다수를 이루고 있다.
나도 조상들의 애환이 묻혀있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뿌리칠 수 없어 공직에서 퇴임하고 자작도 해변에 정착했다. 어린 시절 은모래가 가득한 풀밭에서 친구들과 새 둥지를 찾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놀던 추억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하다. 그때 들판을 뛰어다니며 같이 놀던 친구들은 거의 이곳을 떠나고 몇 명의 친구만 남아 있다.
어느새 고향에 돌아온 지도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가까운 곳에 설악산이 있어 등산과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취미 생활을 병행할 수 있기에 행복하다. 바다에서 미역을 채취하고 밭에서 농작물을 재배하는 일들을 하며 자연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젊은 날, 직장생활을 함께하던 선후배들, 지인들이 방문하면 그들을 대접하고 자연 속에서 맘껏 휴식하게 해 주는 일도 나의 흐뭇한 일상이 되었다.
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끌어안았다가 끊임없이 토해낸다.
바다에 작은 시름까지 털어버리고 매일 새로운 날들이 시작된다.
오늘도 자작도 해변은 갈매기, 파도, 햇살, 찾아오는 지인들의 웃음과 함께 새로운 하루를 열고 있다.
※이 작품은 <수필문학> 추천완료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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