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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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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칼럼 / 김향숙 칼럼위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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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7월 12일(월) 09:49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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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존 덴버, 밥 딜런 이런 가수들의 팝 곡을 좋아하시나요?’ 오래전 어떤 지인과의 이야기 중 내가 들었던 질문이 생각난다. ‘어떻게 그런 유명한 가수들을 모를 수 있지?’ 그는 그렇게 혼잣말처럼 내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보다 15년쯤은 젊어 보이는 그분은 다양한 음악 세계를 잘 알고 있었고 나는 시골 교인들 외에는 별로 만날 사람도 없는 단순한 삶으로, 아는 음악이라고는 약간의 성가곡들과 국내외 가곡, 동요들이 전부였다. 고교 시절에도 그 당시 유행하는 팝송들을 즐기는 친구들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은 나의 진부하고 편협한 성향 탓이라고도 생각한다. LP판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일과 성가곡들. 그리고 1, 2편으로 나누어 수록된 낡은 가곡집은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좋아하는 곡들을 골라 화음까지 넣어가며 동생이 치는 피아노와 함께 소리 높여 부르는 것에 행복해했다. 막내 여동생은 그때. 아마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언니들과 함께 가곡뿐 아니라 부엌 부뚜막 벽에 붙여놓은 시들을 자기 공책 뒷장에 적어두고 외우며 다니는 모습이 우스워 보이기도 했다. 조병화 시인의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같은 무거운 시를 쬐끄만 꼬마가 뜰을 걸어 다니며 중얼거리는 모습이라니.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 . 중략. .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 두고 가는 것을 배우며 사세 /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 인생은 인간들의 옛집 / 아! 우리 서로 마지막 할 / 말을 배우며 사세
어릴 적, 부모님은 늘 따뜻했고 더 넓은 세계를 가르쳐주려고 애쓰셨다. 가족이나 주변 인물들에게서 받은 훌륭한 감성적 문화 환경은 성장 과정의 긍정적 기반에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문학이나 음악, 미술 같은 예술적 감성과 문화적 접근만으로 인간이 얼마나 격조 높은 품위와 품격을 갖추며 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인류문화의 발전과 함께 지금의 환경은 치열한 경쟁 사회의 긴장감으로 불안과 스트레스성 형태의 인간을 빠른 속도로 양산하고 있다. 물질문명의 발전은 이기적 소유욕을 부추기고 여러 분야의 오염된 영역들이 공공연히 존재하는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순수와 선함의 고품격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누구나 그렇듯 그 문제는 나에게도 오래된 숙제이며 아직도 함정을 마주했을 때 감정조절의 갈등에 휘둘리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는 난감함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사람들 앞에서의 수준 높은 품격 이미지는 얼마든지 연기가 가능하다. 그러나 ‘혼자일 때 나는 나에게 누구인가? 하나님 앞에서도 과연 그 품격을 인정받는 사람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누가 얼굴을 들 수 있겠는가. 자존심을 훼손당하거나 억울한 고난 중에도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내 길을 가는 당당함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가난하다는 것으로나 힘의 결핍만으로 자존감이 낮아지지 않고 소유의 비교가 인격의 완성도와 별개일 때 품위의 격은 비로소 시작점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자유로운 자존감은 영혼에서만이 우러나올 수 있는 신뢰의 능력이 아닐까.
내 존재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 그대로의 가치를 존중할 때 의미가 감지되고 그 존중함에서 오는 무게감을 인지할 때 비로소 그 검증의 자각으로 품격이 부여되는 동시에 인간다운 인간으로서의 삶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존중은 곧 사랑’임을 알게 된 것은 별로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도 많이 듣고 흔하게 입으로만 되뇌었던 사랑이라는 단어의 주체는 ‘존중성을 통과한 품격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그러나 나는 자신이 없다. 얄팍하나마 아는 것으로 끝나고 만 잡다한 지식들은 다 어디로 날아가고 여기 빈 껍데기 같은 허한 한숨 소리만 남아 있는가.
소통과 공감, 생각과 언어의 절제된 감정, 순수에의 욕구와 문화적 추구. 지금까지의 이 모든 노력들이 이상적 나의 지침이라 믿었던 삶 앞에 ‘존중은 사랑’이라는 짧은 문장의 해답은 갑자기 맞닥뜨린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목적이 전이된 엄청난 큰 산이다. 배움은 이렇게도 느리고 그 시도의 걸음마가 새삼 낯설고 서툴다.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저 높은 산을 오르는 모습이 이제야 보인다. 나는 아직 갈 길이 먼 어린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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