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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의 성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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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42] / 삽화 윤광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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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3월 31일(목) 10:06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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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 안식년이 끝나고 조선에 빨리 돌아가고 싶어 지름길이라는 대륙을 횡단하는 육로를 택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잘못 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1931년 가을, 베를린에서 간단한 소지품을 구입한 후 소련으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소련은 경제가 어려워 옷감이 부족해 짧은 치마를 입었고 한 덩어리의 빵을 사기 위해 긴 행렬의 줄을 선 모습이 보였다.
레닌그라드 역은 삭막하고 황량했다. 도난 사고도 많아 잠시라도 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련 땅에 도착하여 사람들이 웃는 얼굴을 만나보지 못했다.
여행경비를 현찰로 많이 가져가지 말라는 여행사 직원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잘못이었다. 지갑의 현금도 거의 바닥이 났다. 시베리아 평원을 지나 영국인 여행자 두 명을 사귀었다. 그들은 우리를 조선으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지켜 준 천사였다.
만주에서 러시아 루블로 돌려받은 여행 경비를 소련관리에게 모두 빼앗겼고 설상가상으로 여권에 문제가 생겨 매리언과 월리암은 소련 변경에 남아야 한다고 하였다. 모스크바 관리들이 실수하여 매리언과 월리엄의 여권에 도장을 찍지 않은 것이었다. 소련 관리들은 막무가내로 두 모자를 남겨두고 셔우드만 떠나라고 했다.
다급해진 셔우드는 여행국에 있는 친구가 생각났다. 그에게 연락하여 상황을 말하고 여권에 도장을 찍지 않은 것은 소련관리들의 실수라고 했다. 여행국 친구가 와서 자초지종을 듣고 이 모든 사실을 상부에 보고 하겠다고 했더니 그들의 태도가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한바탕 말씨름이 끝나자 그들은 마지못해 만주로 가도 좋다고 하였다.
영국인 친구들은 국경선을 통과했는데 셔우드 가족이 오지 않아 사고가 생겼는지 알아보려고 소련 경계로 들어오려다 경비병들이 막아 엉거주춤한 상황에서 셔우드를 보고 소리쳤다.
“빨리 표를 사세요! 빨리요! 시간이 없어요!”
“아, 표를 살 돈이 모자라요!”
키 큰 영국 사람이 돈을 꺼내 주어 겨우 3등석 기차표를 끊어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얼마 후 알게 되었지만 그 때 그 기차를 놓쳤으면 아주 큰일을 당할 뻔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것이다. 만주 사변은 1931년 9월, 일본이 중국 둥베이 지방을 침략한 전쟁으로 중일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그 기차를 마지막으로 소련과 만주를 연결하던 기차는 한동안 운행되지 못했다. 기차를 지키고 있던 군인들은 그날 밤 많은 사람들을 총살하려고 했고 영국인 친구들은 기차를 탄 후에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이 몹시 어두웠었다. 셔우드 가족을 1등석으로 불러 차를 마시자고 했는데 만일의 경우 밖을 내다보다가 매리언과 월리엄이 놀랄까봐 커튼이 있는 1등석으로 오게 하였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은 때론 생사를 같이 하는 형제 같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만주의 중심지 목단(지금의 선양)에 도착하니 거리마다 일본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다리가 폭파되고 뒤로 오는 기차는 모든 운행이 정지되었다. 강심장인 매리언도 이번 일에 놀라서 한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구사일생의 어려움을 헤치고 열차는 평양으로 달렸다. 선교사 쇼 목사에게 마중을 나와 달라고 전보를 쳤는데 평양역에 쇼 목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무사히 도착하게 해준 고마운 영국친구들에게 사례하고 깊은 감사를 전했다.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여러 번의 위기를 모면하고 돌아오자 전쟁터에서 살아 온듯 감사했다.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주변 모든 사람들을 천사로 보내주시는 도우심의 손길을 느꼈다.
해주에 돌아오자 많은 사람들이 반가워했다. 닥터 이바스와 직원들의 노력으로 요양원에는 별채가 두 채나 더 세워져 있고 병원도 안정되어 있어 기뻤다.
‘이제 안식년 휴가 때 계획했던 크리스마스 씰 운동을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
셔우드는 크리스마스 씰에 대한 의견들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타진해 보았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서구에서는 성공할지 몰라도 조선에서는 절대로 가능성이 없다고 부정적으로 단정하기도 했다.
“너무나 서구적이라 조선 사람들에게는 생소합니다.”
“우표는 원래 외국 것이었는데 이제는 조선에서도 도시나 벽촌에 보편적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체국 통계에 의하면 신년카드를 보낼 때 팔리는 우표가 8만 달러가 넘고 매년 1만 달러 이상 증가 한다고 합니다.”
곧 서울에서 선교사 회의가 열리는데 셔우드는 그 때 씰에 대한 계획을 추진할 기회가 오리라 믿었다. 씰의 그림을 여러 가지로 도안 해 보았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정부로부터 크리스마스 씰 발행 허가를 받기 위해 평소에 친분이 있 있는 일본 관리 오다 야스마츠를 만났다. 그는 외무성에 근무하였고 영국담당이었는데 셔우드에게 협조적이었고 크리스마스 씰에 대한 생각도 긍정적이었다.
셔우드가 최초로 도안한 그림을 보여주자 그는 한마디로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씰의 그림을 조선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게 하는 거북선 모양으로 고안했던 것이다. 현재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일을 고려하지 못했다.
“일본과 조선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도안을 새로 만들어 오시지요.”
오다 야스마츠는 점잖게 말했다.
셔우드는 씰의 도안을 서울의 남대문으로 바꾸었다. 남대문은 조선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그림이다. 이것은 조선의 방위를 나타내므로 남대문 도안은 결핵을 방어하는 성루라는 의미도 담았다.
드디어 첫 번째 씰 도안과 씰 캠페인에 대한 허가가 일본 관청에서 나왔다. 오다 씨가 성심껏 도와 준 덕분이기도 했다.
1932년 가을, 황해도 도지사를 찾아가 크리스마스 씰 보급에 대한 목적을 이야기 했다. 서양에서 소박하게 시작한 이 운동이 많은 결핵 환자들을 치료하고 결핵 퇴치의 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지사는 이 운동을 후원해 주었다.
해주시청에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한 후 씰을 소개하고 크리스마스 씰 후원회를 만들었다. 도지사는 명예회장이 되고 셔우드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위원회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조선의료선교협회(Korea Medical Missionary Association )에 크리스마스 씰의 보급을 담당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선교병원 중 결핵병동을 가진 병원이 여러 곳 있었으나 전국 결핵협회는 아직 발족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씰 운동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보급 운동을 막 시작하려 할 때 관청에서 갑자기 허가 상에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며 바로잡을 때까지 활동을 정지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가슴이 철렁해진 셔우드는 다시 도지사를 찾아갔다.
“아마 기술상의 문제가 있는 가 봅니다. 제게 맡기십시오. 제가 알아보고 해결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 좋은 동기로 결핵환자들을 고쳐주려고 일하는데요.”
셔우드는 도지사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나오며 존경받을 참 멋진 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도지사의 노력으로 다시 허가가 나와 다시 보급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 고비를 넘었나 했더니 또 어려운 고비가 닥쳐왔다.
“그 미친 짓 같은 크리스마스 씰 사업을 왜 펼친다는 것입니까?”
“이 사업에 실패하면 누가 돈을 상환 해 준답니까?”
“당신은 그 것 말고도 병원, 학교, 요양원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이 많을 텐데 일을 자꾸 벌여 놓으면 어쩝니까? 이 일 때문에 의료선교 일까지 타격 받게 되면 당신 가족들은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조선인, 서양인 친구들까지 합세하여 크리스마스 씰 보급 운동을 반대하였다.
이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정신이 번쩍 들게 할 기쁜 소식이 있었다. 매리언이 임신을 한 것이다. 임신 중에도 매리언은 환자를 치료하였고 셔우드도 학교, 병원, 요양원 일과 틈틈이 크리스마스 씰 보급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32년 10월 8일 매리언은 둘째 사내아이를 낳았다. 여러 사람들이 축하해주고 월리엄은 남동생이 생겨 펄쩍펄쩍 뛰며 좋아하였다. 외할머니 이름을 따라 죠셉 케이틀리(Joseph Keightley)라고 이름을 지었다.
둘째가 태어나고 안정이 되자 잠시 중단했던 크리스마스 씰 캠페인에 다시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씰 위원회에서는 의사 3명, 목사 2명, 평신도 2명 모두 일곱 사람을 홍보대사로 임명하여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며 이 운동의 의미를 전달시키는 사명을 맡겼다. 이들은 모두 자원한 사람들이었다. 뉴욕에서 제이콥스는 크리스마스 씰의 보급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시간을 맞추는 것’이라고 하였다. 크리스마스가 돌아오기 전에 이 씰이 붙은 카드나 편지를 받아 보게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어려움 끝에 조선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이 남대문의 얼굴을 달고 1932년 12월 3일에 발행 되었다.
‘아, 드디어 조선에서도 크리스마스 씰로 결핵퇴치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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