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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홀과 달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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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칼럼 / 이성식 칼럼위원(고성문화원 고성향토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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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07일(금) 12:22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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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고성에는 고성이 없다! 이 명제는 고성군(高城郡)의 슬픈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행정지명의 전통으로 볼 때, 군명(郡名)은 군청소재지명과 일치한다. 그런데 고성군의 군청소재지는 고성이 아니고 간성이다. 이러한 장소성의 불일치, 또는 부재가 문제의 기원이 된다. 최근 옛 고성군의 고구려 지명인 ‘달홀’의 사용 논란도 여기서 비롯된다.
고성현(高城縣)은 원래 고구려 달홀(達忽)이다. 신라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져 고성군이 되었다. (...) 간성현(杆城縣)은 원래 고구려 수성군(䢘城郡)[가라홀(加羅忽)]이다.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져 간성현으로 되었다가 뒤에 간성군이 되었다. (...) 열산현(烈山縣:지금의 현내면)은 원래 고구려 승산현(僧山縣)[소물달(所勿達)]이다.
위의 내용은 1451년에 완성된 『고려사』에 나온 고성군 관련 지명의 변천사를 간추린 것이다. 여기서 보면, 고성군(高城郡)은 신라시대부터, 간성군(杆城郡)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지명이다. 또한 두 군의 역사적 기원은 고구려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지명은 각각 달홀(達忽)[(북)고성 지역]이고 수성·가라홀[(䢘城/加羅忽) 간성 지역]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우선 이 땅이 고성군이 된 연원을 찾아가 보자. 본래 고성군과 간성군은 고구려 시대부터 다른 지명과 장소성을 토대로 한 독립된 행정구성체였다가 두 군이 하나로 통합된 시기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이었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행정의 통합을 시도하면서 고성군을 간성군에 통합시켰다. 이러한 결정은 간성군이 인구가 더 많았고, 역사적으로 고성의 행정을 겸임한 내력 등을 살핀 것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1919년 5월 15일에 또다시 간성군을 고성군으로 군명을 개칭하고 군청사(郡廳舍)도 간성에서 고성으로 옮겼다. 당시의 명분은 금강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발전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부터 간성군이란 군명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고성군이 해방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고성군·간성군 일제강점기 통합-1914년 간성군, 1919년 고성군으로
한편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국토가 다시 분단되고 정전협정에 의한 휴전선은 고성군을 (북)고성과 간성 지역으로 갈라놓고 말았다. 또한 간성 지역은 38선 이북의 북한 통치에서 남한 통치영역으로 편입되면서 ‘수복지구(收復地區)’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당시 수복지구의 통치와 관련하여 행정구역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놓고 국회에서 입법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입법과정에서 수복지구는 ‘8·15 이전으로’ 회복한다는 원칙 아래 1954년 10월 21일 공포된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서 ‘고성군’으로 지정되었다. 이때부터 고성군은 간성면에 군청을 두면서 ‘고성이 없는 고성군’의 역사가 개시되었다. 돌이켜 보면 1954년 ‘수복’ 당시 잃어버린 ‘천년 간성군’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수복 당시 이 지역은 옛 간성군의 강역을 온전히 회복한 반면 옛 고성군의 영역을 아주 일부만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간성군으로 지정해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1954년 8월 15일 첫 고성군수로 장명준(張明俊, 당시 64세)을 임명했다. 이것은 오늘의 고성군을 예고한 사건으로 읽힌다. 그는 고성면 출신으로 1935년 고성면장을 역임했던 인물로 한국전쟁 이후 간성에서 실향민이 되어 ‘반쪽 고성군’의 행정을 개시한 주인공이 되었다. 만약 수복 당시 고성군수로 간성면 출신의 인물이 임명되었다면 천년 간성군의 역사회복은 가능했을까? 한편으로는 군수 장명준의 임명은 당시 많은 실향민들의 통일에 대한 염원과도 무관하지 않은 일로 여겨진다. 수복 직후(1955년경) 간성시가지 중심에 ‘北進統一’의 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는 것은 그것을 시사하고도 남는다.
오늘날 고성군의 역사와 전통을 되살리는 차원에서 고구려의 지명을 사용하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현재 우리 지역에서는 수성지(䢘城址;1960), 수성문화제(䢘城文化祭:1983), 수성제례(䢘城祭禮:1983), 『䢘城의 맥』(2005), 달홀주(2015), 달홀공원(2019), 달홀문화센터(2021), 달홀영화관(2022) 등 고구려 지명이 혼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지명의 혼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시비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지명은 장소성을 본질로 한다. 그런데 수성·가라홀은 장소성을 갖고 있는 반면 달홀은 장소성이 없는 지명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공공재의 경우 상징성을 바탕으로 한, 또는 특정 가치지향을 목적으로 한 달홀의 제한적 사용은 가능한 일이다.
본래 이름은 존재에 대한 규정력을 가질 뿐만 아니라 기대나 환상, 그리고 무의식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이름이 갖는 상징성은 클 수밖에 없다. 우리가 ‘고성사람’, ‘고성문화’ 등의 정체성을 표방하는 것도 ‘고성군’이란 공식적인 이름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수복 이후 ‘반쪽의 고성군’으로 행정을 개시하면서 고성군민들은 나머지 반쪽의 부재를 경험하였다. 이러한 부재 및 결핍의 경험에서 나오는 고성군민의 집단 무의식적 욕망은 ‘하나의 고성군’이 되어야 한다는 통일의 염원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것은 2009년 고성·속초·양양의 통합과정에서 나온 고성군의회의장의 공식 발언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당시 의장은 “(속초시의) 입장은 ‘남북 고성군의 통합’을 갈망하는 지역주민의 기대와 자존심에 찬물을 얹는 지극히 유감스런 발상이다”라며 일축하였다. 그리고 평화와 통일의 상징인 고성통일전망대(1984)는 오늘날 고성군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금강산과 북쪽의 고성군은 고성군민들에게 특별한 장소성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것도 고성군이란 이름의 효과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름에서 그 기원을 묻는 것도 자연스런 현상이기에 고성군의 옛 지명인 달홀을 불러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옛지명인 가라홀과 달홀이 공존의 가치로 건강하게 존재 하길
이처럼 고성군이란 지명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다수 실향민을 포함한 고성군민들의 정서를 두루 살피고 헤아린다면 일편의 역사적 사실만을 들먹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천년 간성군의 역사보다 백년 고성군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따라서 비록 ‘고성이 없는 고성군’, 장소성을 갖지 못한 고성군이지만 그 고유의 지명은 살아 있는 것이고, 고성군민들의 삶에 대해 일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상징적인 힘이라는 점에서 그 고구려 지명인 달홀을 ‘상징적인, 또는 가치지향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공공재의 경우 달홀의 사용이 주류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풍경이 기원을 은폐한다’(가라타니 고진)는 명제가 현실화되기 때문이다. 즉 달홀의 사용이 주류현상이 되면 그러한 풍경으로 인하여 간성군의 수성·가라홀의 역사성이 은폐될 수 있으며, 또한 달홀이 현재 고성군의 유일한 고구려 지명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결론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천년 간성군의 역사를 우리가 홀대하지 말자는 것이다. 늦었지만 수성·가라홀의 존재를 기억하고 그 가치를 발굴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우리 고성군은 근·현대사의 굴곡이 심한 지역이고 그 장소다. 이러한 굴곡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가라홀과 달홀이 공존의 가치로 건강하게 존재하기를 바란다. 가라홀, 수성, 승산, 소물달, 달홀이 함께 공존하는 가운데 새로운 고성군의 가치를 모색하는 것이 미래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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