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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䢘城)과 수성(水城)의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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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칼럼 / 이성식 칼럼위원(고성문화원 부설 고성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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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5월 25일(목) 07:54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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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하나의 전통은 공동체의 역사이고 기억의 전승이다. 우리 간성지역의 전통 역시 그 역사와 기억의 전승이다. 현재의 기록으로 볼 때, 우리 고장의 역사는 고구려 시대부터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다양한 유물 및 유적으로 본다면 선사시대까지 이야기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지명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간성지역의 첫 지명은 바로 수성군(䢘城郡), 또는 가라홀(加羅忽)이었다. 이것은 현재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물론 이 지명은 신라에서 수정되어 수성군(守城郡)이 되었고, 다시 고려시대에 간성(杆城)이란 지명을 얻었다. 이어 조선에 오면서 군명으로 수성(水城)이란 별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䢘城’과 ‘水城’의 전통을 어떻게 이어왔을까 하는 물음을 갖게 된다.
요즘 간성 인근 들판은 수전(水田)임을 실감한다. 물이 차고 벼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농부들이 이제 새로운 희망으로 설레는 때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때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옛 간성군의 진산(鎭山)은 ‘마기라산(麻耆羅山:향로봉)’이었다. 또한 가까운 오음산(五音山)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물은 모든 생명을 키운다. 그래서 예로부터 물관리(治水)는 공동체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것은 고을의 수령이 책임지는 일이었다.
간성군은 바다를 끼고 큰 호수들이 발달한 고장이다. 간성 고을의 남북으로 큰 하천이 흐르고, 성내(城內)에는 우물 3개와 연못 4개가 있었다. 그래서 ‘3井4池’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등 조선 초기의 지리지에서는 우물이 하나였으나, 1872년 간성군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3井4池’가 명확히 표기되어 나타난다. 현재 유적으로 남아 있는 우물은 2곳뿐이다. 4지는 도시의 발달로 없어졌다. 이처럼 간성은 물의 도시(水城)다!
그럼, 수성(水城)의 전통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먼저 1631년 간성현감을 지낸 택당 이식(澤堂李植, 1584-1647)은 간성군의 지리지인 「杆城志」를 편찬하였다. 그 책의 서문은 장유(張維, 1587-1638)가 썼는데, 그의 서문에 <水城志>로 표기했다. 같은 책을 다르게 표기한 것이다. 또한 20세기가 열리면서 전통교육은 점차 힘을 잃고 근대교육에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간성지역은 근대교육에 대한 열정이 어느 지역보다 뜨거웠다. 1906년 건봉사의 봉명학교(鳳鳴學校)에 이어 1908년 간성읍내에도 당시 군수를 비롯한 지역인사들이 주도하여 근대학교를 설립했다. 이 사립학교의 교사(校舍)는 조선시대의 객사(客舍)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것이 바로 간성공립보통학교(1912)의 전신인 수성학교(水城學校)다. 이렇듯 백년대계의 교육을 상징하는 근대학교의 이름을 수성(水城)이라 지었다는 것은 수성의 전통을 잇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앞서 말한대로 간성의 고구려 지명은 수성(䢘城), 또는 가라홀(加羅忽)이다. 조선시대에 ‘水城’을 별칭으로 사용했지만, 고구려 지명인 ‘䢘城’도 오랫동안 사용해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1454)의 간성군 편의 풍속에 ‘무예를 숭상한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것은 고구려의 전통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문인으로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구사맹(具思孟, 1531-1604)은 수성팔절(䢘城八絶)을 노래했다. 수성팔절은 영랑호, 무진대(無盡臺), 만경대, 능파대, 선유담, 화진포, 명사로(鳴沙路), 무송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또한 1872년 간성군에서 제작한 지도에 ‘古邑號䢘城(고읍호수성)’이라 표기한 문헌자료가 확인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간성지역의 청년 박태선(朴泰善) 등이 일찍 청년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청년회 이름을 수성청년회(䢘城靑年會)라 하였다. 당시 독립운동의 뜻을 품은 청년들이 고구려의 지명을 불러왔다는 것은 그 상징성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수성청년회는 1921년에 조직되었다. 이때가 간성군청이 고성으로 이전하면서 간성군의 명칭도 고성군으로 변경한 지 2년이 흐른 시점이다. 식민통치가 한창 진행되고 3·1운동을 겪은 시기에 잃어버린 민족성과 천년 간성군의 역사성을 회복하려는 간성 청년들의 뜻이 청년회 조직으로 표출된 것이다. 박태선은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여러 차례 강연회를 열었다. 그가 한 강연의 제목에는 ‘䢘城청년에게 소(訴)함’이란 것도 발견된다. 그만큼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간성(수성)의 청년들은 왜 守城(수성), 또는 水城(수성)이 아닌 ‘䢘城’이었을까?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겪고 고성지역은 한때 ‘수복의 땅’이라 불렀다. 전쟁의 실향민들이 다수를 이루면서 고성지역은 새로운 삶의 풍경들이 일상을 물들였다. 거진은 새벽부터 ‘선창가의 외침이 온통 함경도 사투리였다’고 전한다. 명태가 지천이었고 학교에는 학생들로 넘쳐나던 시절이다. 전쟁의 기억과 상처가 일상에 녹아들면서 얼마만큼 회복되어 갔을까. 고성군의 전통문화를 되돌아보고 대표 축제를 고민할 기회가 온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1983년의 제1회 수성문화제(䢘城文化祭)다. 당시 많은 지혜들을 모으면서 고구려의 전통이 무엇인지를 숙고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이렇듯 수성(䢘城)의 전통은 면면이 그 맥을 잇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간성지역의 지명을 중심으로 우리 고장의 전통 이야기를 한 셈이다. 고구려, 혹은 조선의 지명 하나를 다시 소환하고 사용하는 것이 곧바로 전통의 회복 및 계승과 등치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부터 파생되는 효과는 다양한 측면에서 그 문화적인 파급력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상상력을 통하여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언어가 갖는 상징성에 그 가치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전통은 기억의 전승이다. 문화의 창조도 기억과 상상력의 문제다. 공동체의 역사를 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은 전통과 문화의 창조를 지향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결국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새로운 창조 역시 전통의 소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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