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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山청년의 고결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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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칼럼 / 이성식 칼럼위원(고성문화원 고성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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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1일(화) 10:59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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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원고성신문 |
[문]1919년 4월에는 왜 경성에 왔었는가.
[답]나는 한일병합(韓·日倂合) 당시부터 조선을 독립시키고 싶은 생각이 있어 기회가 있으면 그 운동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919년 3월 1일에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을 그달 10일경에 듣고 독립운동을 할 작정으로 경성에 왔던 것이다.
[문]일한병합 후 승려는 인격을 인정받고 대우가 좋아졌는데, 어째서 승려인 피고가 조선의 독립을 지망하게 되었는가.
[답]병합 후 승려에 대한 대우는 좋아졌지만 그런 것은 문제 외(外)로, 조선인은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성에서 독립을 희망했던 것이다.
이 문답의 글은 경성지방법원 예심재판부가 1920년 3월 18일에 작성한 정남용(鄭南用)에 대한 심문조서의 내용이다. 그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직후 비밀리에 결성된 ‘조선민족대동단’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다 투옥되어 복역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1921년 4월 18일 26세로 순국하였다. 그의 독립정신과 숭고한 삶을 기려 정부는 1963년 일찍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철통리에서 태어나…11세 때 출가
정남용은 1896년에 고성군 현내면 철통리에서 태어난 열산청년(烈山, 현내면 지역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11세 때 건봉사에 출가하여 스님 신분으로 살았다. 그의 총명함은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져 고성지역 최초의 근대학교(1906)로 알려진 건봉사 봉명학교에 입학하였다. 국권피탈인 경술국치(1910)는 그의 봉명학교 재학 중에 일어난 국난이었다. 그는 법정에서 “당시 소년시대에 일한합병에 대한 시비(是非)를 알 까닭이 없다고 생각되는데, 어떠한가”란 제국판사의 질문에 “합병이 조선에 이익인지 불이익인지는 몰랐으나 ‘조선은 나라가 망했다’는 것만은 알았다.”라고 명쾌하게 진술하기도 했다.
이어 1914년 그는 경성의 휘문의숙(徽文義塾) 중학부에 입학하여 학업을 지속하면서 조선독립의 의지를 불태웠다. 휘문의숙에 다니면서 중앙불교포교당에서도 공부했다. 이때 만해 한용운 스님을 만나 조선독립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주고받았다. 그는 법정진술에서 “친한 사이”라고 말했다. 정남용 스님은 건봉사에 출가하면서 한용운 스님의 존재를 알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용운 스님이 건봉사에서 선수업을 받았던 시기를 1907년경으로 볼 때 정남용의 출가 시점과 일치한다.
특히 정남용 스님은 1917년 휘문의숙의 4년 과정을 중퇴하고 난 직후 고향집에서 보내온 학비 30원을 가지고 일본시찰을 고민하다 조선인들의 생활상을 먼저 살펴보기 위하여 5개월 정도 중국 만주를 거쳐 북간도 지방을 순회하였다. 이때 명동촌(明洞村)에서 잠시 교사생활도 하였다. 이러한 점은 한용운 스님이 1905년 러시아를 비롯하여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일본, 만주를 다녀온 과정과 유사한 이력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 영향사를 엿볼 수 있다.
한편 정남용은 조국의 식민지 상황에 대한 깊은 성찰을 삶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그는 경성에 머무르다 1918년 11월경 귀향하여 철통리 고향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3·1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자신도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의지로 경성에 올라가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대동단의 성공을 위하여 자신의 이름을 ‘必成’(필성)으로 변명하기까지 했다. 이제 독립운동은 그에게 존재의 닻으로 내려졌다. 조선민족대동단에서 그의 역할은 대동단규칙과 선언서의 작성을 비롯하여 신문인 대동신보의 발행(鄭必成 주간), 그리고 배포까지 직접 담당하였다. 심지어 조직을 확장하기 위하여 주변 인물을 영입하는 등 대동단의 핵심사업을 책임지고 있었다. 특히 전협과 최익환, 정남용 등 핵심 간부들은 대동단의 본부를 중국 상해에 두기로 하고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의친왕의 망명길에 안내자로 동행
이어 의친왕 이강(李堈)을 대동단의 수령으로 추대하고 그의 상해망명을 시도하였다. 정남용은 의친왕의 망명길에 안내자로 동행했다. 전날 경성을 출발한 기차로 만주 안동역(단동)까지 무사히 이동하였다. 때는 1919년 11월 11일 아침 오싹한 겨울 공기가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역전을 나서자 잠복 중이던 경찰에 의해 일행은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상해에 본부를 두고 ‘제2독립선언’을 준비 중이던 대동단의 계획은 어둠이 짙어지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낮을 밤처럼 살았던 그의 열정적이고 긴박했던 삶은 새로운 위기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조국으로 이송되어 강도 높은 수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년이 넘게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채 재판을 받은 결과는 징역 5년의 선고(1920년 12월)였다. 적용범죄는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출판법 위반 등으로 보안범죄에 해당되었다. 그는 고문에 시달리는 등 형무소에서 신음의 고통을 겪다가 1921년 4월 18일 26세로 옥사하고 말았다.
병명은 폐병이라고 전한다. 그가 사망하자 서대문형무소는 건봉사와 고향집에 전보로 통지하였다. 이에 건봉사에서는 고인의 스승인 정인목(鄭二牧) 스님과 친형 정빈용이 급히 달려와 서대문 인근 봉원사에서 화장으로 장례를 올렸다. 이 자리에는 불교청년회원들과 신도들 다수가 자리를 지켰다고 전한다. 당시 언론은 성품이 ‘고결한 사람’이라는 주변의 평을 담아 보도했다. 필자는 이러한 그의 인간됨을 재판과정의 진술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烈山청년 정남용! 그는 어린 나이에 부처님의 세상을 꿈꾸었다. 그의 불가와의 인연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건봉사의 봉명학교에서 근대학문과 접촉하면서 배움의 세계를 인식했다. 신분은 스님이면서도 사찰의 계율에만 몸을 맡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경성의 중등학교로 배움의 터를 옮겨 보았으나 민족의 현실로부터 밀려오는 시대정신과 식민지의 사회모순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내면의 갈등은 깊어만 갔다.
결국 3·1독립운동을 계기로 그는 흔들림 없는 삶의 좌표를 찾았다. 독립운동의 길이었다. 그 길에 온 생명을 다 바쳤다. 그렇게 청년의 힘은 죽음마저 넘어선(섰)다. 한 청년의 고결한 삶을 온전히 대면하는 일은 가능한 일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오늘 우리 청년들의 삶의 좌표는 무엇일까. 이 질문과 함께 “가장 원대한 비현실을 붙드는 사람만이 가장 원대한 현실을 창조해낼 것이다.”라는 한 철학자의 말을 다시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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