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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타고 북관(北關) 어디쯤으로 시집가는 이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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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담 작가의 ‘옛 동해북부선 철길을 걷다’ <2> 문암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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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4월 28일(월) 06:50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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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송암리에는 옛 문암역 관사가 있다. 휴전선 이북의 일은 알 수 없고, 옛 동해북부선 이남 노선 가운데 유일하다. 터무니가 아니다. 건물은 볼품부터 색다르다. 두 채 가운데 한 채는 비었고, 다른 한 채에는 주민이 거주한다(사진). | ⓒ 강원고성신문 | |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출토된 검고 반질거리는 흑요석기(黑曜石器)를 떠올릴 때면 백두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흑요석이 백두산 지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5000년에도 남과 북을 오르내리며 교류했을 이들, 오히려 선사시대였으므로 아무런 걸림이 없이 오갔을, 아니 1927년 펴낸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를 읽다가 호사비오리의 고향을 찾아가는 박웅의 『백두산 새 관찰기』를 펼쳐보다가 생각은 육당이 타고 갔던 경원선에 이어서 그 뒤에 완공된 함경선을 타고 길주역에서 다시 혜산선으로 갈아타는 꿈을 꾸다가 문득, 삼지연공항에서 백두산 관광용 비행기를 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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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쩌면 기차는 가파르게 솟구치는 이주의 꿈을 채찍질하면서 철커덕, 철커덕 문암천을 가로지른 문암철교를 건넜을 것이었지만, 오늘의 나는 문암천 천변에서 전쟁 중 폭격으로 다리받침으로만 남은 문암철교를 어쩌지 못하고 그려만 봤다. | ⓒ 강원고성신문 | | 천진리역에서 오전 10시 무렵 출발한 기차는 아야진항을 멀리 에돌면서 늘찬 설악산 대청봉 능선과 울산바위를 가까이는 운봉산과 야촌 드루(들), 대고깔(죽변산)과 먼산주름 끝으로 이어지는 금강산 향로봉을 바라보면서 북쪽으로 내달렸을 것이었지만, 산하가 통곡 속에 갇힌 어느 날은 해무도 짙어서 길섶의 미루나무건 복숭아나무건 진달래꽃이건 숭얼숭얼 물방울이 맺혀서 유령처럼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기차는 가파르게 솟구치는 이주의 꿈을 채찍질하면서 철커덕, 철커덕 문암천을 가로지른 문암철교를 건넜을 것이었지만, 오늘의 나는 문암천 천변에서 전쟁 중 폭격으로 다리받침으로만 남은 문암철교를 어쩌지 못하고 그려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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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송암리에는 옛 문암역 관사가 있다. 휴전선 이북의 일은 알 수 없고, 옛 동해북부선 이남 노선 가운데 유일하다. 터무니가 아니다. 건물은 볼품부터 색다르다. 두 채 가운데 한 채는 비었고(사진), 다른 한 채에는 주민이 거주한다. | ⓒ 강원고성신문 | | 함경북도 명천에서 출생한 소설가 현경준은 1939년 단편소설 「오마리」를 발표하는데, 이 소설에 눈길을 주었던 것은 이 배가 정어리를 잡는 배였기 때문이었다. 사전에 따르면 오마리배는 ‘일제 강점기에, 주로 명태나 정어리 따위의 고기 떼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오는 경상도와 강원도 지방 어민들의 고깃배를 이르던 말’로 ‘잡은 물고기는 함경도 지방의 항구에서 팔고 돌아갔다.’ 또한 1939년 조선일보에 발표된 어느 ‘풍토기’를 읽다가 청어, 정어리를 언급하면서 속초, 문암진을 못박은 것을 보았고, 지금도 정어리공장의 흔적이 문암진리에 ‘공장거리’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었으므로. 1930년대 동해안에서 최고의 어획고를 올린 어종이 정어리였고, 이 정어리로 짠 기름은 침략전쟁을 벌이던 일제의 군용물자로 사용되었다. 정어리공장은 속초를 비롯 공현진, 거진 등 동해안 항구마다 세워졌다.
동해북부선 이남 노선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문암역 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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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운봉길과 야촌뜰길이 교차하는 곳에 옛 문암역사 터가 있었다. 어느 해는 작은 조립식 주택이 있었으나 이제는 거대한 창고가 들어섰고, 마당에는 제설 장비들이 줄느런히 섰으며 울타리를 둘렀다. | ⓒ 강원고성신문 | | 운봉길과 야촌뜰길이 교차하는 곳에 옛 문암역사 터가 있었다. 어느 해는 작은 조립식 주택이 있었으나 이제는 거대한 창고가 들어섰고, 마당에는 제설 장비들이 줄느런히 섰으며 울타리를 둘렀다. 옛 철길은 고스란히 농로로 사용되고 있었고, 어디에도 역으로 쓰던 건물(驛舍)이라는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풍경은 때때로 기원을 은폐’하므로 이곳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온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송암리로 불리는 마을은 한국전쟁 전까지 문암진리였고, 송암리는 ‘수복’ 이후의 일이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있던 때 문암진리와 이웃한 삼포리에 민통선이 생겼고, 피난민들은 문암진리, 망개라고 불리는 곳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생긴 속칭이 ‘똥골’이었다.
송암리에는 옛 문암역 관사가 있다. 휴전선 이북의 일은 알 수 없고, 옛 동해북부선 이남 노선 가운데 유일하다. 터무니가 아니다. 건물은 볼품부터 색다르다. 두 채 가운데 한 채는 비었고, 다른 한 채에는 주민이 거주한다. 그랬으므로 멀찍이서 구경한다. 어느 해는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마당으로 들어서기도 했지만. 바깥에서 아무리 까치발로 살금살금 오가도 집 안의 개는 목청이 크다. 구경꾼들에게 시달려서 그럴까, 잠시 생각하다 바삐 그곳을 벗어났다. 설령 그곳이 아무리 귀한 유산이라고 할지라도 구경하는 자는 그저 구경꾼일 수밖에, 그렇더라도 어느 날 다시 마을 주민의 도움으로 마당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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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농로로 바뀐 옛 철길에서 송암리 주민 내외를 만났다. 낯선 이들이었지만 곰살가웠다. 대대리에서 운봉리로 시집오셨다는 할머니 얘기를 전해들을 때는 마음이 설레었다. | ⓒ 강원고성신문 | | 농로로 바뀐 옛 철길에서 송암리 주민 내외를 만났다. 낯선 이들이었지만 곰살가웠다. 대대리에서 운봉리로 시집오셨다는 할머니 얘기를 전해들을 때는 마음이 설레었다. 기차를 타고, 아마도 간성역에서 기차를 타셨을 테고, 문암역에서 내려 다시 가마를 타고 운봉리로 가셨다는 얘기는 내가 어릴 때, 이웃에서 이웃으로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고 머리에 족두리를 얹고서 활옷을 입은 채 가마를 타고 시집가는 신부를 보았던 터라 그 정경이 저절로 그려졌다. 어떤 신문물이 생활로 스며들 때는 부침을 겪지 않을 수 없을 테지만, 새로운 동해북부선이 부설되고 있는 지금, 이후에도 기차 타고 북관(北關) 어디쯤으로 시집가는 이를 볼 수 있을까.
옛 철길을 잠시 벗어나 자작도 해변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 년에 서너 번쯤 암서낭이라고 불리는 할머니서낭을 찾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금줄이 쳐졌다. 매년 정월 초사흘에 제를 지낸다는 이곳 바다 끝 뿌다구니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커다란 바위굴에는 풍화작용으로 생긴 풍화혈이 있고, 구멍 곳곳에는 오리나무로 깎은 남근이 꽂혀 있으며 비닐로 포장된 분홍색 옷감도 보인다. 몸을 돌리면 해안 끝 군부대 정문 가까운 곳에 다시 말하면 ‘고성 문암리 유적’이 있는 뒷산 등성이에 수서낭, 할아버지서낭이 있다. 그래서일까, 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정작 다른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느라고 바빠서 영영 마주보기만 하라는 형벌 아닌 형벌에 처해진 것은 아닐까.
신라와 고구려 전쟁이 남긴 유산은 고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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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자작도 모래불을 지나 고성 문암리 유적 앞에서 해뜩발긋 고묵은 살구나무를 만났다. 울타리만 쳐 놓은 마치 산에 등을 기대고 있는 듯한 유적은 텅 비어서 오히려 편안했다. | ⓒ 강원고성신문 | | 자작도 모래불을 지나 ‘고성 문암리 유적’ 앞에서 해뜩발긋 고묵은 살구나무를 만났다. 울타리만 쳐 놓은 마치 산에 등을 기대고 있는 듯한 유적은 텅 비어서 오히려 편안했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래전의 낯선 이들을 떠올리는 일은, 아니 층층 켜켜이 쌓인 시간의 두께를 어루더듬는 일은 차라리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만큼 아마득한 일이었으므로 숲정이 기스락에 핀 분홍빛 복사 꽃잎을 따라서 산마루에 있는 할아버지서낭을 생각했고, 그것이 오히려 내게는 알맞은 일이었으므로 걸음은 다시 미륵불로 향했다. 자그마한 한 쌍의 미륵은 낡삭아서 이제는 얼굴마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신라와 고구려 전쟁이 남긴 유산은 고스란했다.
동해를 등지고 문암대교에 섰다. 문암진리는 문암천을 사이에 두고 ‘고성 문암리 유적’이 있는 곳이 문암진1리이고, 능파대가 있는 곳이 문암진2리이다. 문암천 끝에는 운봉산이 마주보이고, 교암리와 송암리를 잇는 7번국도 교량 아래에서는 다리공사를 위한 물밑 작업이 한창이다. 낡고 망가지면 새것으로 고치거나 아예 갈아엎고 새롭게 만들겠지만 때때로 한번 망가뜨리면 돌이킬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잠시 문암천 물줄기를 따라 걷다 능파대에 이르렀다. 어느 아이돌 그룹이 다녀간 뒤 능파대는 답압으로 인해 곳곳에 나무뿌리가 드러났고, 관광객은 어쩌다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내 관심은 커다란 바윗돌에 새겨놓은 바위 글씨, 凌波臺였다. 봉래 양사언의 글씨라고도 하고 문충공 신익성의 글씨라고도 하나 글자는 해가 갈수록 비바람에 닳고 삭아서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흐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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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내 관심은 커다란 바윗돌에 새겨놓은 바위 글씨, 凌波臺였다. 봉래 양사언의 글씨라고도 하고 문충공 신익성의 글씨라고도 하나 글자는 해가 갈수록 비바람에 닳고 삭아서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흐릿하다. | ⓒ 강원고성신문 | | 어느 때는 문암진의 문이 문(文)인지, 문(門)인지를 두고 엎치락뒤치락하였으나 파도가 높게 휘몰아칠 때면 글자는 힘을 잃고, 다만 물갈기가 바위에 부딪힐 때마다 흩어지는 물보라만 보였다. 벌집 모양의 풍화혈, 타포니를 구경하면서 바윗돌 사이로 난 덱을 걸어서 방파제 쪽으로 나갔다. 능파대에 들를 때마다 문암진항과 이웃한 항구의 방파제를 쌓기 위해 능파대의 바윗돌들을 쪼개서 옮겼다는 이야기가 되살아오곤 했다. 능파대는 이제 뭍도 아니고 섬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위용을 다 잃은 것은 또 아니었으나 관음굴이라고 불리는 곳에 테트라포드를 쌓아서 파도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없게 된 것은 퍽 애잡짤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때때로 우리는 어떠한 ‘배웅도 마중도 없이’ 보배롭고 귀한 것들을 잃고서도 잃은 줄도 몰랐다.
능파대는 어쩌면 건봉사의 능파교처럼 이승의 고해를 건너 서방의 극락정토로 향하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옛 공현진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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