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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릿발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북천철교 지금은 자전거길로

김담 작가의 ‘옛 동해북부선 철길을 걷다’ <5> 거진역

2025년 06월 12일(목) 11:18 [강원고성신문]

 

↑↑ ◇ 북천철교(北川鐵橋)는 지금의 간성읍 봉호리와 거진읍 송죽리를 잇던, 북천을 가로질렀던 철다리였다. 옛 동해북부선 양양역과 저진역 사이에 있는 철교 가운데 교각(橋脚), 다릿발이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지금은 자전거길로 이용되고 있다.

ⓒ 강원고성신문

북천철교(北川鐵橋)는 지금의 간성읍 봉호리와 거진읍 송죽리를 잇던, 북천을 가로질렀던 철다리였다. 옛 동해북부선 양양역과 저진역 사이에 있는 철교 가운데 교각(橋脚), 다릿발이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지금은 자전거길로 이용되고 있다. 한국전쟁 와중인 1950년 10월 12일 미 공군의 항공 폭격으로 궤도는 사라졌고, 이들은 이 폭격 전후를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그것도 ‘Railroad Bridge between Chodori and Kanson’이라고 써서. 그렇더라도 북천철교 한가운데서 알락할미새와 참새, 왜가리 그리고 파랑새의 지저귐을 배경으로 첩첩한 먼산주름이 고을을 감싸안고 있는 듯한 금강산 향로봉 연봉들을 아무런 걸림 없이 바라다보며 어느 시절 있었다던 금동아미타삼존상이 출토된 사찰을 상상하는 일은 기껍다.

미역을 말리기에는 하늬바람이 좋듯 걷기엔 가만바람에 비 없는 날이면 더할 나위 없으니 아무쪼록 큰바람이 불지 않기를 바라면서 발걸음을 뗐다. 북천철교를 지나면 잠시 철둑길이 이어지다 진부령로를 가로질러 송포교 옆 다리받침을 지나면 철둑길은 밭으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이곳은 새 동해북부선이 지날 예정인지라 노랗고 빨갛고, 파란 깃발들이 꽂혔고, 용마는 태어났으나 장수는 태어나지 않아서 마산(馬山)이 되었다는 바닷가 산을 등지고, 다시 한쪽 다리받침만 남아 있는 초계천, 마산교에 이르면 길은 새 7번국도인 동해대로가 부설되면서 얽히고설킨다. 눈앞에 보이던 향로봉은 이제 숲정이 뒤로 사라지고, 논들은 바닷가로 이어지며 펼쳐진다. 주민들이 식재한 방풍림은 거대한 솔숲이 되어 해안선이 되었다.

기찻길은 옛 7번국도와 섞이다 이후 갈라져

↑↑ ◇ 반암리 마을로 들어서면 동해대로 방음벽과 마을 사이에 기찻길이 남아 있었지만, 대전차 방어벽 앞에서 곧 동해대로에 흡수되었다가 송포교차로에서 다시 찻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기찻길의 방향을 가늠했다.

ⓒ 강원고성신문

반암리 마을로 들어서면 동해대로 방음벽과 마을 사이에 기찻길이 남아 있었지만, 대전차 방어벽 앞에서 곧 동해대로에 흡수되었다가 송포교차로에서 다시 찻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기찻길의 방향을 가늠했다. 돌고개길 근처를 몇 차례 오가던 끝에 모내기하는 나이 든 농부를 만났고, 송포교차로가 생기기 전 기찻길이었던 터를 사려고 했었다던 얘기를 들으며 지금의 거진교로 이어지는 기찻길을 확인했다. 기찻길은 옛 7번국도와 섞이다 이후 갈라져 자산천로가 되었고, 거진철교 또는 자산철교라고 불렀을 철다리는 ‘거진교’가 되어 자산천을 가로질렀으며 길은 다시 수외길이 되어 거진역으로 향했다. ‘시우’ 또는 ‘월정리’라고 불리던 곳에 거진역이 있었다. 전쟁 당시 거진인민학교 3학년 학생이었던 명숙은 거진역이 폭파되던 때, 바닷가에서 멱을 감으며 놀고 있었고, 폭격에 놀라 발가벗은 채 혼비백산이 되어 집을 향해 냅뛰었다.

↑↑ ◇ 거진철교 또는 자산철교라고 불렀을 철다리는 ‘거진교’가 되어 자산천을 가로질렀으며 길은 다시 수외길이 되어 거진역으로 향했다.

ⓒ 강원고성신문

1938년 4월 극광제작소에서 제작, 1938년 10월에 상영된 영화 「漁火」는 만들 당시, 일간지는 동해안 거진으로 ‘로케-순’을 떠나는 소식을 전한다. 원작은 서병각, 감독은 안창호의 아들 안철영으로 일본과 독일에서 유학한 이다. 영화의 일부 배경은 거진 뒷장 가는 언저리이고, 내용은 흉어로 빚 독촉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바다에서 불귀의 객이 되자, 딸인 인순을 첩으로 달라며 빚을 독촉하던 영감의 아들인 철수와 함께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떠나는데 이때 거진역에서 기차를 탄다. 다음 행선지는 보이지 않지만, ‘거진’이라는 역 표지판은 선명하다. 이들은 온정리역이라고도 불리던 외금강역에서 내려 금강산 구룡폭포를 구경하기도 하는데 인순은 치마저고리 차림이다. 아마도 이들은 안변역에서 경원선 기차로 갈아타고 서울에 당도했을 테지만 영화는 거기까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거진(巨津), 명태와 오징어로 이름을 날리던 때 인구가 폭발하면서 학교를 세우던 시절도 있었다. 풍어와 흉어는 지역 경제의 흥망성쇠는 물론 한 가정의 생사를 좌우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멸치잡이가 성했고, 정어리 공장이 세 곳이나 있었다. 봄철엔 꽁치, 여름철엔 오징어, 겨울철엔 명태로 흥청망청했다. 거진 시장 안에는 ‘어시장’이 따로 있었고, 그리고 시장 입구에 극장이 있었다. 옛일이다. 그렇더라도 아파트로 변한 덕장 터도 있었지만, 읍내 곳곳엔 명태 덕장의 자취가 여전하다. 명태는 지방태와 원양태로 나눴고, 어린 나는 원양태를 본 적 없었으며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은 장에 내다팔 마른 명태를 꿸 싸릿가지 등을 손질하여 겨울 가욋벌이를 했다. 어린 나는 명태와 생선을 세는 단위인 쾌, 두름, 뭇, 바리 등을 배웠지만 이 또한 잊혔다.

↑↑ ◇ 그렇더라도 아파트로 변한 덕장 터도 있었지만, 읍내 곳곳엔 명태 덕장의 자취가 여전하다.

ⓒ 강원고성신문

바닷가 근처는 겨울이면 덕장으로 바뀌었고, 여름이면 서커스단이 등장하는 놀이터였다. 여름이면 한번쯤 어른들을 따라 바닷가로 멱을 감으러 갔고, 이때는 조개도 줍고 섭도 따서 죽을 끓였다. 겨울이면 우리집 처마에도 명태가 걸렸고, 명태눈깔을 빼먹느라고 매바빴지만 어른들은 마을에 생긴 덕장에서 명태 벨을 땄고, 품삯으로는 벨과 곤지를 받았으며 이것을 손질하여 시장에 내다팔았다. 명숙의 어린 시절엔 목선으로 명태를 잡았고, 집에서 말린 명태를 이고지고 촌으로 팔러 다녔으며 곡식, 꿀 등과 교환했다. 제사가 많았던 우리집이었던 만큼 제사상에 올릴 마른 오징어를 소금 항아리에 감춰두었으나 어린 우리들 손길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역이었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거진항은 일제강점기엔 원산, 부산으로 향하던 여객선이 들르기도 했던, 해로의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60~70년대는 명태바리 나섰던 배들이 납북되는 일이 빈번했고, 이남으로 송환되었더라도 반공법, 국가보안법, 수산업법 등으로 처벌받았고, 심지어 간첩으로 조작되는 일조차 있었으며 그 피해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풍비박산된 가정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1967년 1월 명태바리하던 배들의 보호 임무를 맡았던 56당포함이 피격, 침몰했고 6월이면 국민학생이었던 우리는 머리띠를 하고 당포함전몰장병 충혼탑까지 행진했다. 국민학생이었던 시절 거진 앞바다에 간첩선이 나타났고, 피란을 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옥신각신했으며 삐라를 주워야 하는 숙제를 하느라고 들판을 헤맸다.

↑↑ ◇ 할머니는 고기잡이 나간 아들을 기다리느라고 무속인들에게 ‘용태부인당’으로 불리는 성황당이 있는 ‘망재이 꼬댕이(망꾼 꼭대기)에서 바장였으며…

ⓒ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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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숙은 거진면 보롱골(지금의 거진1리 성황당이 있는)에서 태어나 자랐고, 아버지는 7대 독자로 배를 몰며 고기를 잡았다. 할머니는 고기잡이 나간 아들을 기다리느라고 무속인들에게 ‘용태부인당’으로 불리는 성황당이 있는 ‘망재이 꼬댕이(망꾼 꼭대기)에서 바장였으며 명숙은 때때로 해당화 열매인 ‘율구’를 따러 반바우(盤岩)까지 다녀왔고, 동무들이 거진철교로 건널 때 철다리가 무서웠던 명숙은 물살을 가르며 자산천을 건넜다. 명숙의 어머니는 바다에서 뜯어 말린 김을 들고서 거진역에서 고성역으로 장사를 다녔다. 때때로 삶은 문어도 들고서. 막내 외삼촌은 청진역에서 근무했고. 전쟁의 와중에 집은 폭격으로 불타고, 이웃으로 피란한 뒤 잠자리에 누웠다가 할머니는 다리를, 어머니는 가슴을, 언니는 어깨를 다쳤다. 솜이불 한 채를 피로 물들였다. 이후 ‘아가리배(LST)’를 타고 속초 대포항까지 나가서 그곳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나 묵호까지 피란했다.

↑↑ ◇ 거진 부둣가를 지나 신복상회 앞, 옛 거진역 터 앞에 섰다. ‘철도역은 물자를 흡수하고 쏟아내는 신흥 개발지였고, 역 부근은 일본인 관사나 상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였다.’고 하였지만 전쟁의 포화가 지난 자리는 이후 목재소, 고물상 등으로 사용되다 얼마 전 민간에게 불하되었다고.

ⓒ 강원고성신문

거진 부둣가를 지나 신복상회 앞, 옛 거진역 터 앞에 섰다. ‘철도역은 물자를 흡수하고 쏟아내는 신흥 개발지였고, 역 부근은 일본인 관사나 상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였다.’고 하였지만 전쟁의 포화가 지난 자리는 이후 목재소, 고물상 등으로 사용되다 얼마 전 민간에게 불하되었다고. 아무리 보아도 역이었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잘 곳 없는 피란민들이 몰려들고, 철길 주변은 주인 없는, 국유지였고 무단점유가 가능했을 것이므로 수외길로 남은 기찻길 옆은 집들이 빽빽했다. 어릴 적 방학이면 할머니를 따라 사촌들과 함께 서커스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 할미재를 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했던 점방, 신복상회도 주인이 바뀌었다. 이웃한 주민은 이사 온 지 20년이 되었지만 기차역에 관한 기억은 없다. ‘파도에 묻혔다 소식은 없었다 밤에 생긴 상처는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도망치지 못했다 거진항’이라고 허연은 시 「거진」에서 말했듯, 거진역 터에서 화포리 철둑길까지는 기찻길도 어렴풋했다. <계속>

강원고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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